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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3월13일 제 1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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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던 할머니들이 만세 삼창을 외치고 있다.)
1997년 3월1일. 유난히 맑았던 하늘은 쌀쌀한 바람을 뚫고 따듯한 봄볕으 로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독립의 의지를 만천하 에 선포하기 위해 세웠다는 독립문에도 3월의 햇살은 어김없이 쏟아졌다. 이제는 공원으로 변한 옛 서대문형무소는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원혼을 불 러내고 있었다. 일찌감치 무대 앞을 차지한 관객들은 예행연습까지 지켜 보며 일본의 국가적 배상과 사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아직 도 ‘일본군 종군 위안부’라는 단어가 낯선 이들은 나붙은 대자보에, 몇 점 안 되는 당시의 기록사진들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후 4시. 무대 뒤 독립문에서 풍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풍물굿패 살 판의 길놀이는 원혼으로 구천을 떠돌던 독립지사들의 원귀를 부르고 친일 의 잔재를 몰아내며 무대에 형상화된 할머니들의 고통을 부활시켰다. 공 연을 준비하느라 한달여 마음을 졸이고 입술까지 터져버린 공연준비팀의 얼굴에 뿌듯함이 서리고 추위를 견디던 할머니들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관계자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노래마을의 ‘백두산’이 깨어나는 민족정기에 힘을 보태고, 약속된 두 곳의 공연을 어렵게 취소하고 참여한 송시현은 ‘평화의 나라’가 완성되는 ‘꿈결 같은 세상’을 만드는 길을 들려주었다.
진행을 맡은 홍순관·오숙희 두 사람은 관객들의 흥과 열정에 겨워 길게 노을을 남기는 해라도 붙잡을 기세였다.
(사진/연인원 1만여명이 참가한 이날 행사에서 모금된 금액은 1천3백여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시민연대 윤영애 집행위원장의 인사말은 이미 관객과 할머니들, 나아가 온 국민이 함께 하는 정신대운동의 승리의 순간을 점치게 했다. 저 멀리 국토의 남단 제주도에서 날아온 최덕신은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너를 사랑해’에 힘을 주며 ‘동참’을 호소했다. 작가 조정래씨는 <한겨레21> 에 실린 공연광고를 보고 공연기획팀에 성금을 전달할 방법을 묻다가 무 대에 서게 됐다고 했다. 1백만원의 성금까지 내며 무대에 선 그는 진정한 독립운동의 방법을 설파해 관객들의 힘찬 박수를 받았다.
<한겨레21> 오귀환 편집장이 정신대할머니 온겨레돕기 운동의 의의를 설 명하는 순서를 넘기면서 공연은 절정에 이르렀다. 한겨레신문사 노래패의 찬조출연에 이어, 신세대 가수 리아는 자진해서 공연에 참여해 가장 여리 면서도 매력적인 말투로 ‘할머니들, 지켜요’를 호소했다. 윤도현의 노 래에 이어 무대에 선 한영애의 열창이 끝나고 무대에 올라온 김학순 할머 니는 이제야 정신대문제를 최초로 폭로한 보람을 찾는 것 같다고 말하며 이 공연을 만들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관객과 출연진 모두의 눈시울을 적셨다.
거리의 네온이 하나둘 불을 밝힐 즈음 무대에 선 꽃다지는 ‘바위처럼’ 단결해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을 만드는 길이 민족의 자존을 찾는 길이라고 힘차게 노래했다. 동물원이 ‘널 사랑하겠어’와 ‘변해가네’ 를 열창할 즈음 객석은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손에 손을 잡고 일어선 관객들의 거대한 흐름은 안치환을 만나면서 ‘당당하게’ ‘자유’를 선 언했다.
이어 조명 스위치를 내린 깜깜한 무대에는 할머니들의 기록들이 슬라이드 로 비쳐지고 변영주 감독은 이날 공연을 위해 특별히 재편집한 <낮은 목 소리>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영화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 었다.
(사진/3.1절을 맞아 서대문 독립공원을 찾아온 가족들이 촛불을 들고 한마음으로 `정신대할머니 돕기'운동에 나서고 있다.)
관객들은 손에 손에 받쳐든 촛불에 불을 밝히면서 이선희를 맞이했다. 정 신대할머니의 죽음을 소재로 만들어진 곡 ‘어느 할머니의 극락’이 환하 게 불을 밝힌 남산타워 꼭대기보다 더 높은 하늘로 날아가 이름도 모를 남양에서 숨져갔을 이름없는 정신대할머니를 위로하고 ‘아름다운 강산’ 에 이들의 피가 배어 있음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마지막, 용감하고 당당하게 싸움을 해오는 정신대할머니들이 무대 에 올랐다. 병들고 지친 육신이었지만 기개만은 비겁한 이 시대를 나무라 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불러주신 ‘우리의 소원 통일 ’은 잊지 말아야 할 반쪽을 다시 일깨우며 78주년 삼일절의 의의를 되새 기게 했다. 함께 무대에 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효재 공동대표의 ‘한겨레 선언’이 공연의 끝을, 그리고 새로운 정신대운동의 시작을 알 릴 때까지 관객들은 시샘하는 겨울의 마지막 바람을 이겨냈다.
관객의 손에서 여린 빛을 내는 촛불이 밝게 모든 이들의 가슴을 비추고 있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