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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3월13일 제 148호 한겨레21

오키나와 밝히는 ‘평화의 등불’

(사진/일본의 군국주의를 반대하며 일왕 아들의 오키나와 방문 당시 화염병을 던진 치넨 이사오.)

1975년 7월17일 일왕의 아들 아키히토가 오키나와에 왔다. 2차대전에서 희생된 유골들을 모아놓은 ‘비명의 탑’에 참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참배는 쉽지 않았다. 탑 안 방공호에서 1주일 동안 숨어 있던 오키나와 청년 두명이 아키히토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기 때문이다. 2차대 전에서 무려 23만여명(오키나와 민간인 12만2천여명 포함)을 죽음으로 내 몬 일왕의 자식을 오키나와 청년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명의 청년 가운데 한명은 아직 오키나와에 살고 있다. 치넨 이사오(47) . 25살로 당시 대학생이던 그는 사건 이후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다. 그는 아직도 당시의 결의를 생생히 기억한다. “너는 오 키나와를 버렸고 아시아의 전체 민중 앞에 죄를 지은 나쁜 놈이다.” 친 구 고바야시와 함께 방공호에서 1주일을 지새며 그가 되풀이한 생각이다. “천황은 전범이며 범죄에 대해서는 사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 었다”는 게 그의 꺾이지 않은 신념이었다. 애초에는 화염병 대신 폭탄을 쓰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면 오키나와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곳에 천황제 반대 문구 새겨

목숨을 건 투쟁을 무릅썼던 그는 지금 부동산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 인이다. 그렇다고 청년의 기백이 다 꺾인 것은 아니다. 일본의 국가인 기 마가요나 일장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헤이세이(平成)` ~년 ’식으로 표기하는 천황력을 쓰지 않고 서기년을 고집한다. 기지 안의 땅 한평씩을 사서 반기지운동을 벌이는 1평반전지주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9 5년에는 <여성 유린의 한>이라는 책도 썼다.

그의 꿈은 역사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잘못된 역사를 알게 됐고 그래서 감옥에 가게 됐다.” 94년 아키히토 일 왕이 다시 오키나와를 찾았을 때 항의시위 때문에 다음날 바로 쫓기듯 떠 난 일이 있었다. 그는 이를 “역사의 발전”이라고 불렀다.

많은 오키나와인들은 이른바 ‘천황제’를 부정한다. 물론 독립을 계속 유지하다 1877년에야 일본에 복속된 역사적 배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천황제가 전쟁의 근원이라는 인식에서 생긴 현상이라고 볼 수 있 다. 오키나와인들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무렵 발생한 미군의 오키 나와 상륙작전 이후 벌어진 지상전을 ‘오키나와전쟁’이라 부른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내세운 전쟁의 명분은 ‘천황을 지키기 위해 오키나 와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규모 살육과 ‘옥쇄’로 불리는 집 단자살의 원인이 천황제에 있다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오키나와 남부 해안의 평화공원 안 평화자료기념관 2층에는 천왕제를 반대하는 문구가 써 있다. 공식적인 장소에서 천왕제를 비난하 는 문구는 일본을 통틀어 이곳이 유일하다.

천황제와 일본의 군국주의,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주의 모두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오키나와인들은 역사적 경험으로 확인한 셈이다.

치넨 세이코(67)는 도쿄에서 살다 91년 조상의 고향 오키나와로 돌아왔다 . 그를 오키나와로 돌아오도록 만든 것은 ‘치마저고리’였다. 도쿄에 있 을 때 한국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자 신도 민족의상을 입기 시작하면서 결국 이주까지 결심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지금 ‘류큐인들의 독립운동’(IMPR: Independent Movement of the Ryuchuan Peoples)이라는 조직에서 활동한다. ‘류큐’는 일본에 복속되 기 전 오키나와 독립국가를 부르던 이름이다. 그는 “미국의 전쟁전초기 지로 변한 오키나와를 독립시켜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활동한다고 밝힌다. 오키나와국제대학에서 민족경제의 발전방향을 연구하 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도쿄에서 이주해올 때 오키나와 땅 한 평을 사서 1평반전지주회의 회원이 됐다.

그는 미군기지가 철수돼야 하는 이유에 대해 “기지가 있는 한 전쟁에 대 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걸프전 때는 섬 전체에 전 쟁의 기운이 돌아 그야말로 준전시상태였다. 수천대의 비행기가 연일 상 공을 날고 사람들은 오키나와전쟁의 악몽에 시달렸다”는 게 그의 회상이 다.


전쟁과 인권 등을 아로새긴 미술관

(사진/오키나와국제대학에서 민족경제를 연구하며 1평반 전지주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치넨 세이코.)

침술사 미치오 사키마(51)는 기지 안에 있던 자신의 땅을 반전의 상징으 로 바꾼 인물이다. 일본 본도에 살던 미치오가 오키나와로 옮겨 살기로 생각을 굳힌 것은 화가 마루키 이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마루키는 오키 나와전쟁과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주로 그린 반전화가다. 오키나와에서의 평화운동을 찾던 미치오는 먼저 후텐마 미공군기지 안에 있던 조상의 묘 를 되돌려 받고자 했다. 92년 임대기간이 끝나는 것을 계기로 일본 정부 에 땅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애초에 반환에 적극적으로 나설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일본 정부의 절차는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웠다.” 결국 그는 일본 정부에 대한 기대를 버 리고 미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반환요구를 벌였고 미군은 뜻밖에 쉽게 동 의했다. “미군당국은 조상의 묘가 있는 데다 옥수수밭으로 방치되던 땅 이라 큰 부담없이 생색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 다.

그는 반환받은 5백50평의 땅에 미술관을 짓기 시작했다. 94년 11월에 완 성된 이 ‘사키마미술관’에는 마루키의 그림과 독일의 괴테 골피츠, 프 랑스의 루오 등 대표적인 반전화가들의 그림 수십편이 걸렸다. 그림의 주 제는 하나같이 전쟁, 인권, 인간의 존엄성 등이다.

미술관은 반전의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후텐마고등학교 1학년9반 학생 들이 공동제작한 모형물이 대표적이다. 기지를 돌려받은 뒤에 어떻게 활 용할 것인가를 의논한 뒤 제작한 것이다. 미술관 앞마당의 돌무덤도 평화 의 큰 뜻을 품고 있다. 지난해 6월23일 오키나와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추 모하는 ‘영령의 날’에 근처 가이후고등학교 학생들이 조그마한 돌조각 23만6천95개에 각각의 번호를 써붙인 것이다. 숫자는 전쟁의 희생자를 나 타낸다.

이 뿐이 아니다. 미치오는 지난해 9월8일 현민투표 때는 정부가 만든 포 스터에 대항하는 뜻으로 주민들의 요구를 상징하는 포스터를 만들었다. “아이를 지키는 것은 어머니이지, 군대가 아니다.” 포스터의 구호는 미 치오의 아이디어였다.

오키나와에 도도히 흐르는 반전평화의 흐름은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것을 뛰어넘어 일본 자위대기지를 반대하는 움직임으로까지 발전했다. 일본 북 부 도요하라지역은 9년 동안 일본 자위대기지를 반대하는 농성이 계속되 고 있다. 그 역사와 함께 한 이가 이시가와 세이키(76)다. 그는 이곳에 자위대의 대잠수함초계기(P3C) 송수신기지를 건설하려는 일본 정부의 방 침에 반대해 20여평의 가건물 안에서 9년째 농성중이다. 60가구에서 1명 씩 대표를 뽑아 순번을 매겨 땅을 지킨 것이다. 건설의 움직임만 보이면 사이렌을 울려 주민들을 모으는 끈질긴 투쟁에 정부쪽도 두손을 들고 건 설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이곳에 8백여평의 땅을 갖고 있는 이시가와는 자기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 고 농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지가 있으면 공격의 대상이 된 다. 지금은 전쟁이 필요없는 시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기지가 들 어서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에서 승자란 없다. 걸프전을 보자. 겉모습으로는 미국이 이긴 것 같지만 사실은 미국도 울고 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진/아시아와이드캠페인의 오키나와 대표로 반기지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니시오 이치로 목사.)

니시오 이치로(50) 목사 또한 오키나와 반전평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아시아와이드캠페인(AWC: Asia Wide Campaigne)의 오키나와 대표이 다. 오키나와AWC은 91년 걸프전이 일어나고 오키나와 전체가 전쟁분위기 에 휩싸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의 평화집회가 열리면서 결성됐다. 본도에서 목사생활을 하던 니시오는 오키나와로 옮겨 목사생활 을 시작했다.

그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9년 일본 정부의 야스쿠니신사참배 법제화 움직임과 1970년 베트남전쟁 때문이었다. “신사참배, 군대, 천왕 제는 일맥상통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 민을 깊게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밥을 굶어가면서 50시간 동안 토론을 벌였다. 처음으로 데모대에 참가하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 불교 등 여러 종교에 두루 관심이 많았는데 교회일에 깊이 관여하는 바람에 목사의 길 을 걷게 됐다.”

그는 지금 1평반전지주회 회원으로 반기지운동에도 적극 간여하고 있다. 그는 미군기지의 완전철수만이 오키나와에 확실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고 주장한다.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나가서 한국으로 간다면 그것은 더 나쁜 일이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최근 오키나와 일부 기지의 지역 내 이 전과 일본 본도로의 이전을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방침에도 반대 한다. 오키나와에서 나가라는 것은 일본에서 나가라는 것이고, 그것은 결 국 세계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미군기지는 세계에서 없어져야 한다

오키나와의 반기지운동은 반전평화사상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 서 그들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등 큰 전쟁 때마다 자신들의 땅이 미군의 병참기지로, 전진기지로 쓰여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 민중들을 죽이는 데 쓰였다는 점에 강한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오키나와 가 아시아 반전평화운동의 중심으로 서 있는 것은 바로 이들이 있기에 가 능한 일이다. 오키나와 반전평화운동의 기수들인 이 ‘오키나와의 작은 거인’들은 10만의 병력을 현상유지하며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독차지하려 는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에 적지 않은 파열구를 내고 있다. 그 파열구가 커질수록 평화를 사랑하는 아시아민중들의 희망도 커지고 있다.

오키나와=김창석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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