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야기 |
1997년03월13일 제 148호
|
|---|
1905년 5월, 12살 소년 도창식은 두살 아래 아우와 함께 이름도 생소한 멕시코의 유카탄반도 베라크루스항에 닿았다. 기다리는 건 애니깽농장의 중노동. 그는 이제는 유카탄의 주도 메리다 교외의 작은 마을에 있는 노 동자 숙소에 한장의 흑백사진으로 남았다.
74살 난 아들 도 알베르는 그 사진을 꽃과 십자가로 장식해 47년 전 세상 을 떠난 아버지를 기리고 있다. 삼촌 도 호세는 어쩌다 헤어져 소식을 모 른다. 아버지는 마야 처녀와 결혼했고, 아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칠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고국에 대한 향수만은 대물림했다. 아버지와 함 께 메리다의 한인회관에서 주최한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기억은 지 금도 생생하다. “3.1절 기념행사는 해방 전부터 열렸어요. 회관에서 애 국가도 배웠지요. 해방이 된 뒤에는 48년까지 열렸던가요.”
유카탄의 한국인 가운데 가장 유창한 모국어를 구사하는 이 텔마 할머니 는 `올드 랭 사인'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4절까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 `애국가'와 독립만세의 기억은 도산 안창호와 연관돼 있다. 도 산의 연보에는 1918년 1월, 40살의 안창호가 멕시코를 방문해 그곳 교민 들을 위한 활동을 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이역의 한인들에게 고국에 대 한 기억과 사랑을 표현할 계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지난 3월2일, 메리다 중심가의 볼란테스홀에 `애국가'와 만세삼창이 다시 울려 퍼졌다. 유카탄 한인 후예의 모임 ‘코르멕스’가 49년 만에 3.1절 기념행사를 부활시킨 것이다. 8백여명의 코레아노가 칸쿤, 체투말, 캄페 체, 창마이, 녹악, 사낙닥 등 반도 곳곳에서 몰려왔다. 마야의 피가 섞인 2대, 3대 후예들이 대부분이고, 한국어를 말할 줄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애국가'도 스페인어로 풀어 쓴 가사를 배워가며 불러야 했다. 그러나 아 직도 집을 물으면 그 이웃들이, “아, 코레아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지난 96년 8월 발족한 코르멕스의 회장은 텔마 할머니의 큰아들 박 울리 세스(56)씨. 그는 “다시 이렇게 모이게 되다니 기쁘다”며 눈물을 훔친 다. 영화 `애니깽'의 모델로 알려진 김순이 할머니의 두 아들 고흥용씨와 아마도 코로나도 자식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멕시코식 창씨 개명을 할 때, 고씨들이 주로 택한 성이 코로나였다. 산체스라면 원래 성이 최씨, 킹이라면 김씨였으리라 짐작하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김순이 할머니는 몇해 전 1백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이민 1세대는 이제 유카탄에 남 아 있지 않다.
1905년 마야의 땅 유카탄을 향해 제물포를 출발한 배에는 1천33명의 조선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항해 중 2명이 죽었다. 이들에게 제시된 계약기간 은 4년이었지만, 당초 이들을 위한 귀국선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기다 린 것은 애니깽농장의 혹독한 노동 착취뿐이었다. 용설란에 속하는 이 애 니깽은 화학섬유가 발명되기 전까지 밧줄과 천짜기에 쓰이던 중요한 천연 섬유를 제공하는 식물이었다. 유카탄의 부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러나 농주들만 부자였지 농장사람들은 너나 없이 가난했어요. 농주는 물론 모두 에스파뇰(스페인사람)이었죠.” 이 텔마 할머니의 말대로 스페 인이 문명의 뿌리부터 말살한 마야사람들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 다. 마야사회에 섞여든 한인들과 그 후예들에게 부모의 가난은 그대로 대 물림되고 있다.
유카탄의 애니깽농장은 멕시코 시티로, 쿠바로 퍼져나간 이 지역 한국이 민사의 출발점이다. 특히 농장들이 화학섬유에 밀려 몰락한 뒤 한인들은 메리다로, 미국 접경지역의 티후아나로 이동해갔다. 그래도 지금 이 지역 의 한인 후예는 2천여명을 헤아린다.
한인회 코르멕스는 감리교 선교사로 메리다에 파견된 조남환 목사가 ‘취 업이민’의 후손들을 하나 둘 찾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다. 2년 가까이 축 적된 만남이 코르멕스로 발전했다. 국내와 미국 한인교회 사이에 후원자 도 생겼다. 이번 기념식에는 마이애미의 남부 플로리다 연합감리교회에서 한국음식을 장만해 와 잔치분위기를 냈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 자랑스럽다”던 이들은 그 고국이 “멕시코에 공 장을 많이 지어 한인 후예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고 기대하기도 했다. 최근 몇해 사이 이곳을 찾은 한국의 방송사나 대종 상 수상 의혹만 불러놓고 잠자고 있는 영화 `애니깽' 제작진들이 뿌린 희 망이기도 하다.
멕시코 메리다=안정숙 기자/ 한겨레 문화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