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
1997년03월13일 제 148호 한겨레21

예술혼 흐르는 상업미술

(사진/초상화를 35년째 그리는 파리화실의 박용길씨. 시들지 않은 장인정신으로 삼각지를 지키고 있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 화랑가. 눈물과 애환이 서린 곳이다. 용산우체국에서 미8군 정문까지 도로 1km 양쪽에 형성돼 있는 이곳 화랑거리에는 크고 작 은 화랑, 화방, 화실 80여개가 몰려 있고 그림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무명 화가 3백여명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곳이다. 인사 동이 동양화와 고서, 골동품을 중심으로 유명작가들의 그림을, 청담동이 고가의 서양화를 주로 취급하는 데 비해 삼각지는 값싼 서양화 작품이 유 통되는 곳이다. 한국의 몽마르트르 거리인 셈이다.

이곳엔 유명화가부터 신출내기 화가까지 다양한 층이 활동하고 있는데 경 제적으로 어려운 무명화가들이 많다. 때문에 이곳 화랑은 대부분이 5~10 평 정도로 인사동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어느 곳 못지 않다. 미술작품과 액자의 종류가 다양한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몇 만원대의 상가 장식용 그림부터 수천만원대의 고급작품이 한자리에서 거 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 호당 5천~2만원(비포장)으로 지방 , 신도시 화랑가로 도매되는 종류의 그림이 대부분인데 중산층 애호가들 에게 잘 나가는 30호 정도라면 이곳에선 30만~60만원선에 장만할 수 있다 (1호가 대략 엽서 한장 크기이므로 10호 그림이면 엽서 10장을 붙인 크기 다). 인사동, 압구정동에서 호당 5만~6만원에 팔리는 것들도 대부분 이곳 에서 그린 것이 많다.


박수근도 삼각지 거쳐갔다

이곳에 화랑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6·25 직후 용산에 미8군이 자리 를 잡으면서부터다.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씩 문을 연 화실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파리화실의 박용길(60)씨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35년 전 이곳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초상화만을 그리 고 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회화부문으로 옮긴 데 반해 그는 초상화만을 고집하고 있다. 이 노화가는 “비록 초상화 작가지만 장인정신을 잃은 적 은 없다”면서 “데생에 중점을 두고 몇년간 기초에만 충실했던 옛날과는 달리 요즘엔 붓을 채 들기도 전에 돈벌이에 나서려는 젊은 화가들이 너무 많아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50년대 말 이후 가난했던 무명화가들이 이곳 삼각지를 채워나갔다. 개중 에 드물게는 유명화가로 올라서는 일도 가끔 있었다. 가장 서민적인 한국 인상을 화폭에 담아온 작가로 이중섭 화백과 함께 짧은 한국현대미술사 속에서 전설이 된 박수근(1919~65) 화백도 중학교 진학도 포기할 정도의 가난한 집안형편 탓에 이곳에서 미군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삼각지 화랑의 전성시기는 60~70년대였다. 60년대 말 수출그림, 이른바 이발소 그림, 키치미술이 나타나던 시기였다(키치란 1860년 독일 남부에 서 파생된 말로 ‘아무렇게 주워 모으다’ ‘진품이 아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딘가 촌스럽고 색채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현란한 저급한 그림들을 ‘키치미술’이라고 부른다). 삼각지 미술은 이러한 키치미술로 부터 시작했다. 미국에 수출하는 값싼 서양화들이었는데 초창기엔 붓으로 물감을 캔버스에 찍어 그린다는 뜻에서 ‘쫑쫑이’ 그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산과 들이 넓게 펼쳐지고 그 가운데로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전원풍 경, 그리스신화의 요정같이 두볼에 홍조를 띠고 곱슬곱슬한 금발머리에 통통하고 예쁜 서양아이들, 때론 눈을 이고 있는 고즈넉한 초가집 등이 이곳 그림의 단골소재였다. 그리고 밀레의 <만종> 같은 유명작품을 그대 로 복사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화가들은 회사에 소속되어 주문에 따라 하루에 수십장씩 그림을 그렸다. 10m 가량의 받침대에 캔버스를 죽 이어놓고 자리를 옮겨가며 페인트로 똑 같은 그림을 10여장씩 그렸던 것이다. 솜씨가 뛰어났던 이들의 그림은 미 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수출될 만큼 수량도 어마 어마했다. 미국 현지에선 한국그림이 부려지는 날이면 화상들이 몰려와 그림도 보지 않고 박스째 사재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큰 수출그 림 회사로는 미국 뉴저지에 지사를 둔 ‘대륭’, ‘영풍’, LA에 지사를 둔 ‘아메리아’ 등이 유명했다. 한 회사가 매월 5만~10만달러씩의 그림 을 수출하던 최고의 호황기였다. 그러나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화가들의 인건비가 올라가 수출그림의 가격도 함께 오르면서 이들 회사들은 임금이 싼 중국, 동남아 등지로 옮겨갔고 국내에선 거의 자취를 감췄다.


‘빵’을 위한 그림에 장인정신 심는다

(사진/삼각지 화랑은 현란한 화풍의 상업적인 키치미술로 시작해 서양풍경과 정물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60,70년대 해외로 수출하던 그림.)

삼각지 그림들도 시대변화에 따라 변모했다. 경제수준이 향상되면서 국내 가정집이나 가게 등에서 그림수요가 늘어나 내수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 다. 그림경향도 ‘쫑쫑이’라는 자조적 표현으로 불렸던 조악한 그림들이 자취를 감췄고, 판에 박은 풍경화 일색이었던 수출그림과는 달리 소재나 주제가 다양한 형태로 거듭났다. 현재 삼각지에서 유통되는 다양한 그림 을 이곳 화가들은 ‘상업미술’ 또는 ‘생활미술’이라고 부른다.

삼각지의 화가들은 ‘수출그림’ ‘키치미술’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현재 삼각지에 있는 이들의 상당수는 수출그림, 키치미술을 그렸던 이들 이 많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러한 과거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이다. 어려 운 시절 어쩔 수 없이 ‘빵’을 해결하기 위해(이곳 화가들은 이 표현을 자주 쓴다) 창작정신을 접어두고 일반인들의 기호에만 충실했던 생명력 없는 그림을 그렸던 시절은 이들에겐 아픈 상처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현재 자신이 삼각지에 있다는 사실마저도 감추고 싶어한다.

사진촬영과 이름 밝히기를 원치 않은 김영호(50·가명)씨도 그러한 과거 를 보냈다. 그는 그룹전을 몇 차례 개최했고 지방화랑가에서 꽤 인기를 얻으면서 더이상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삼각지에 화랑을 내기전인 2년 전만 해도 키치미술을 그려왔다. 미 술계의 밑바닥에서부터 지금까지 30년에 이르는 그의 미술인생은 67년부 터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교 졸업 뒤 곧바로 마장동에 있던 수 출미술 회사에 들어갔다.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오로지 그림만 그리 던 하루일과였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왔던 그는 일이 끝나고 나 면 자취방에서 주문그림이 아닌 자신만의 진짜(?) 그림을 또 그리기 시작 했다. 당시 그의 수입은 일반 회사원의 3배 가량이었다. 그 사이 가정도 이뤘고 국전에 나가 몇번 입상도 했지만 유명작가로의 꿈은 쉽게 이뤄지 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그는 사이사이 카드, 달력 그림 등을 꾸준히 그렸다. 그러다 2년 전 이런 키치미술을 모두 청산했다 . 삼각지로 들어와 조그마한 화랑을 차렸지만 그는 이젠 주문그림도, 고 객의 비위를 맞추는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만을 그 릴 뿐이다. 그것이 팔리느냐 않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그는 자신의 그림 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기성작가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림에 대한 그의 평가다. 그는 “과거 수출그림 경험이 때론 창작정신을 말살시키기도 했으나 당시의 부단한 습작이 지금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기성작가가 되는 길은 아직 멀다. 비즈 니스를 하고 수천만원이 드는 개인전을 열어야 한다. 그는 아직 한번도 개인전을 갖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유명해지는 건진 압니다. 기성작가 로의 꿈은 버린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저 죽기 전에 화실에 재어둔 내 그 림들을 내놓을 수 있는 전시관 하나 갖는 게 소원이죠”라는 그의 말엔 쓸쓸함이 배어 있다. 오늘도 그는 자신의 작은 화랑 한 귀퉁이에서 붓을 들고 캔버스를 대한다. “얼마나 신이 나서 그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누구도 이렇게 맑은 색을 내진 못해요”라고 말하는 그의 입가와 눈매에 웃음이 넘쳐났다.

루다화실의 이종열(46)씨는 자신의 그림을 ‘상화’(상업미술)라고 자처 한다. 그도 김씨만큼 결코 순탄치 않은 미술인생을 걸어왔다. 그의 미술 인생도 74년 수출그림에서부터 비롯됐다. ‘아메리아’의 직원으로 89년 베이징에 지사를 설립했고 미국지사에서도 근무했었다. 그는 지난 몇년간 그림을 중단하기도 했다. 보험회사 생활설계사, 목수 등의 일을 했다. 하 지만 그림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지난 1월 삼각지에 자리를 잡았 다. “배운 게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더군요. 지금 내 그림은 싸구려 상 업미술입니다. 하지만 남의 그림을 베낀 것도 아니고, 언젠가 정말 내 그 림을 그릴 때가 오겠죠. 또 5백년, 1천년 뒤에 이 그림들이 또 어떻게 평 가받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또 안 되면 어떻습니까?” 그의 말엔 달 관의 냄새가 느껴진다.


‘인사동’ 넘보는 물감냄새 자욱하다

이곳 화가들이 기성 화단에 느끼는 감정은 하나의 애증이랄까? 끝없이 기 성화단으로의 진입을 갈구하지만 때론 좌절하고 때론 자학하면서 하루하 루를 보내고 있다. “가만히 그림만 그려서는 절대 기성화단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제사정 탓에 개인전은 엄두도 못내고 세월만 보내죠. 상업미술을 그린다는 자체가 화가로선 하나의 비애인데 최근엔 불황 탓에 그러한 상화마저도 다른 화가들과 가격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점이 또다른 비애죠.”

이곳 화랑가 번영회 조직을 추진했던 ‘박아틀리에’ 박명복(49)씨의 말 이다. 그래서 어떤 화가들은 60%는 팔리는 상화를 그리고 나머지 40%는 자신의 온전한 창작물에 시간을 쏟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삼각지 상업미술을 그저 값싼 그림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빈약 한 우리 미술계에 작품의 질과는 상관없이 작가의 이름이 가격을 좌우하 는, 마치 부동산 투기와도 같은 혼탁한 미술시장과는 별도로 미술을 생활 의 하나로 자리잡게 만든 곳은 인사동이 아니라 바로 이 삼각지이기 때문 이다.

삼각지엔 오늘도 해가 뜨고 그곳에선 무명화가들의 땀과 눈물에 젖은 물 감냄새가 항상 자욱하다.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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