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맛 기행
1997년03월13일 제 148호 한겨레21

보리밥

보리를 작물로 재배해 먹은 것은 지금부터 7천~1만년 전까지 거슬러올라 가야 한다고 한다. 러시아와 미국, 중국 등이 주생산국이고,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하니까 천년이 넘는 셈이다.

벼농사 위주의 우리 농촌에서 농한기인 가을과 이른 봄에 파종했다가, 모 를 심기 전에 수확하면 햅쌀이 날 때까지 큰몫을 해내는 쌀 다음 가는 작 물이 보리다. 더욱이 1년 중 식량이 가장 모자라는 시기에 주식을 감당해 왔기에 쌀 이상으로 많은 애환이 담긴 먹을거리이기도 하다.

요즘엔 과자와 빵 등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수확 즉시 전량 쌀보리로 도정하여 밥을 지어먹었다. 쌀에 비해 단백질과 지방, 탄 수화물 등은 다소 떨어지지만 칼슘과 철분, 비타민 B군 등은 오히려 더 풍부하다. 다만 약점이라면 소화흡수력이 다소 떨어지는 데다가 섬유질이 쌀의 5배 이상이나 많아 곧바로 통변과 이어져 영양분의 흡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금방 배가 꺼지는 것이다.

그런데다 쌀의 과잉생산과 비싼 인건비로 해마다 보리 경작이 줄어들어, 지금쯤 보리싹이 파랗게 자랐어야 할 논들을 대부분 그대로 묵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보리쌀이 쌀값과 비슷하게 됐고, 최근엔 보리밥이 별미 겸 건강식으로 호사를 누리고 있다.

옛날 같으면 지금부터 춘궁기에 접어들면서 ‘세상에 가장 넘기 힘든 고 개’라는 ‘보릿고개’로 접어들게 된다. 그래서 쌀은 이미 떨어지고 저 장했던 보리쌀이라도 넉넉해야 햇보리가 날 때까지 견딜 수 있었다. 그렇 지 못한 농가에서는 ‘장미쌀’이라 하여 가을에 같은 분량의 쌀로 갚기 로 하고 그나마 꿔다 먹어야 했다.

보리밥은 먹는 방법도 어느 고장이나 거의 비슷하다. 양을 불리기 위해서 도 그랬고, 또 그래야만 제맛이 났다. 솥 밑에 누룽지가 앉도록 가마솥에 푹 뜸을 들인 뒤, 으레 큼직한 그릇에 퍼 이것저것을 넣어 썩썩 비벼 먹 었다. 봄 들녘에 나는 쌉쌀한 들나물과 야채가 들어가고, 고추장과 된장 찌개가 필연적으로 곁들여졌다. 또 풋고추라도 열리기 시작하면, 고추를 된장에 듬뿍 찍어 와삭와삭 씹으며 먹는 맛을 최상으로 여겼다.

지금도 50대 후반에서 60이 넘은 어른들은 그때의 맛과 향수를 잊지 못한 다. 입술이 얼얼하게 부풀 정도로 맵고, 목구멍이 화끈하도록 뻘겋게 비 벼 먹은 뒤, 구수한 보리숭늉을 한사발 쭉 들이켜고 나면, 너나 할 것 없 이 배가 풍선처럼 불러올랐고, 모처럼 허리를 펴고 앉아 포만감을 만끽하 곤 했던 것이다. 그때의 배고픔과 함께 흐뭇했던 포만감이 아마도 가장 잊을 수 없는 향수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 같다.

이런 정서에 착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 도시근교에 보리밥 전문집들이 부쩍 늘고 있다. ‘보리밥’ ‘꽁보리밥’ 또는 ‘시골밥상’ 등 다양한 이름을 내걸고 옛 보리밥상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또 이런 깃발이 펄럭이는 음식점마다 승용차들이 줄지어 한편으론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 다.

값도 1인분이 4천원선으로 저렴하고, 어느 집이나 맛도 크게 차이가 없다 . 보리쌀이 푹 퍼지도록 뜸이 들면 되고, 구수한 된장찌개와 제맛 나는 고추장, 풋고추를 곁들이면 된다. 마지막으로 보리숭늉까지 맛보면 보리 밥 맛은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먹고난 뒤 그 후유증(?)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유난히 가 스가 많이 차는 보리밥은 먹는 만큼 가스발생량도 많아, 경상도 내륙에서 는 지금도 왕년에 좀 넉넉하게 산 사람들을 가리켜 ‘그 사람 방귀 꽤나 뀌었다’고 한다. 충청도에서는 실없이 큰소리치는 사람을 보고 ‘보리밥 먹고 헛김 새는 소리한다’며 입막음을 한다.

아무튼 별미로라도 보리밥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 들녘에 파란 보리밭을 다시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보리밭을 좋아하는 종다리들도 다 시 돌아올 테고.


순두부와 보리밥의 오묘한 조화

한강 상류의 강동대교에서 구리시와 퇴계원을 우회하여 광릉과 베어스타 운 스키장을 차례로 거쳐, 이동으로 오르는 47번 도로는 베어스타운을 지 나면 이내 신팔리사거리(일명 서파사거리)에 이른다.

이 사거리를 중심으로 좌회전하면 명덕온천을 거쳐 포천읍으로 넘어가고, 우회전하면 가평군 현리를 지나 조종천을 따라 경춘가도로 나서게 된다. 서울북쪽 나들이 길의 요충지다. 이곳 서파사거리 왼쪽모서리에 순두부집 이 둘 있다. 이중 원조순두부집(0357-33-5479)은 순두부와 보리밥을 함께 내는데 그 차림이 먹음직스럽다. 순두부를 시켜도 보리밥이 따라나오고, 보리밥을 시켜도 순두부가 따라나와 더욱 별미다. 뭐든 양도 푸짐하게 내 놓아 더욱 옛스럽다.

서울에서 이동으로 오르는 47번 국도는 구리-장현(진접면)간 4차선 우회 도로가 개통되어 소통이 원활하다.

김순경/ 여행칼럼니스트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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