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이 부부의 ‘작은 세상’
1997년03월13일 제 148호 한겨레21

손님 접대의 모범생?

하예린과 함께 있으면 도대체 심심할 시간이 없다. 아이는 어느날 한 친 구의 전화를 받고는 거의 자체 연락망을 작성했다. 영은이의 전화번호를 안 아이가 영은이에게 전화를 하고, 영은이는 한솔이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고 한솔이에게 전화를 해서 민지의 전화번호를 알고, 민지는 또 태성이 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이런 식으로 이 아이 저 아이와 전화를 한 아 이는 “엄마, 이제 우리 유치원 아이들 전화번호 10개도 넘게 안다”면서 자랑이 대단하다. 물론 자신의 친구들에게 우리집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응, 내가 없으면 전화응답기에 메모 남겨놓는 거 잊지 말고”라고 말하 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날부터 우리집 전화기는 불이 났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와보면 그렇지 않아도 전화응답기에 담겨 있는 온갖 사연들을 한참을 돌려야 했는데, 이 제 하예린 친구들에 의해 우리 전화기는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응답기 에 “여기는 반쪽이네 집입니다. 녹음해주세요”라고 말하는 하예린 목소 리에, 아이들은 그야말로 즉각 반응했다. 하예린 친구들은 너도나도 우리 전화기에 하예린 흉내를 내며 여러 통씩 녹음을 해놓았다. 어떤 경우에는 한사람이 서너통씩 해놓은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예린에게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전화 소동도 잠시, 하예린은 누군가와 소통을 기다리며 오전이 저물 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내가 전화에 매달려 있는 동 안 우리집 문밖에서 “하예린!” 하고 부르는 소리에 아이는 너무 반가와 서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여기서 참고로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우리집 문 엔 ‘최하예린의 집’이라는 하예린의 앙징맞은 문패와 메모지가 달려 있 고 ‘반쪽이’이니셜이 쓰여 있다. 물론 별로 티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 내 이름은 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데 자기 친구들이 아니라 아줌마 들인 것을 안 아이는 아마도 내 손님들이라 생각하고는 자기 나름대로 접 대를 하였다. 내가 저 방에서 전화받는 사이 아이는 “엄만 뭐 하시니?” 라는 말에 내 가방을 뒤져서 명함을 그분들에게 주었고, 들어와서 앉기를 권하였다. 그리고 마치 제 아빠가 우리집에 온 손님들에게 우리집 안 이 곳저곳을 구경시키듯이 제 나름대로 친절히 설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편 말을 빌리면 거의 전화삼매경에 빠져 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내가 거실에 나타났을 때, 하예린의 그 ‘엄마 손님들’은 모두 내 명함을 하 나씩 들고 있었다. 물론 나는 매우 당황했고 “어디서 오셨죠?”라고 물 어 나의 당황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분들은 이 동네 관할 보험설계사들 이었는데, 집 문에 아이 이름을 적어놓은 게 신기해서 한번 이름을 불러 본 게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서로 미안한 순간이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사귀고 싶은 우리 아이는 엄마가 당황하든 말든 오늘도 또한번 자신과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아이의 이 순진한 행동이 때로는 어른들을 당황시키는 것이다. 이럴 때 “친구들 과 사이좋게 놀아라” 또는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해야지”라는 말은 쏙 들어가고, 나는 의심스러운 얼굴을 한다.

변재란/ 영화평론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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