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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3월13일 제 1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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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주부가 매장을 돌다 식품진열대 앞에 멈춰선다. 반토막짜리 호박과 온전한 호박을 두손에 나눠 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런, 왜 매장을 빙빙 도시나? 아하! 꼼꼼히 따져보고 사는군요. 역시 깐깐한 주부답네.” 이번엔 수첩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입술을 쫑긋하 고 양미간을 좁힌 모습이 꽤나 신중하다. “우잉? 서세원씨가 뭘 저렇게 들여다보죠? 오! 살 걸 미리 적어왔구만. 안팎으로 돈 샐 틈이 없겠군요. ”
소비자 유혹하는 힘있는 무기
절약을 강조하는 광고가 유행이다. 공익광고야 원래 그렇다 치더라도 일 반 상품광고에까지 그 바람이 거세다. 자동차에서 전화, 청바지, 햄버거, 식용유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들이 절약형임을 앞세워 소비자를 파고든 다. 이 물건을 사거나 쓰면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카피가 기본을 이룬다. 다른 제품에 비해 낭비를 막을 수 있고, 세금도 가벼워서, 결국 내집 마 련이 빨라진다는 식이다. 광고업계에선 이런 광고를 ‘절약형 광고’라고 부른다.
LG화학의 세제광고를 보자. ‘절약형의 한판 승부’라는 제목이 붙은 이 광고는 절약이 중요한 경쟁력임을 보여준다. 광고는 최근 대중화한 리필 용 비닐팩과 절약형 플라스틱 용기를 비교하며, 어느 것이 더 경제적인가 를 묻는다. 시합요령은 간단하다. 비닐팩과 플라스틱 용기를 든 주부가 각각 벨트마사지 기구를 끼고 내용물을 다른 용기에 옮겨 붓는 것이다. 결과는 플라스틱 용기의 완벽한 승리다. 비닐팩은 물컹물컹해 몸이 흔들 릴 때마다 내용물이 삐죽삐죽 흘러나오지만, 플라스틱 용기는 그럴 염려 가 없다. 내용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다른 용기에 옮긴 승자는 이렇 게 자랑한다. “같은 값이면 절약형이죠.”
맥도널드 햄버거 광고는 아예 노골적이다. 다짜고짜 계산서를 내민다. 먼 저 이런 카피가 등장한다. “천원으로 뭘 먹지?” 물론 피자도 아니고, 칵테일도 아니고, 갈비도 아니다. 하다못해 설렁탕도 아니다. 달랑 천원 짜리 한장 가지고선 어불성설이다. 광고는 그런 현실을 희화적으로 보여 준다. 피자는 눈꼽만큼이고, 칵테일은 입가심도 안 되고, 갈비는 코앞에 서 뭉텅이째 싹둑 잘려나간다. 설렁탕은 숟가락이 바닥을 긁는다. 답은 이거다. “맥도널드에서 순쇠고기 햄버거가 9백원.” 그러면서 백원짜리 동전 하나가 땡그랑 하고 떨어진다.
왜 지금 이런 광고들이 나오는 것일까. 애초 상품 자체가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상품의 장점 을 널리 알리는 게 무릇 광고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광고 전문가들은 대 부분의 광고에서 상품의 가격경쟁력은 중요한 요소라고 얘기한다. 다른 제품에 비해 값이 싸다는 점은 소비자를 유혹하는 유력한 무기라는 것이 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왜 지금일까.
이성에 호소해 경제적 이점 전달
광고업계에 따르면 이런 광고는 지난해 후반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이전까지는 오히려 비싼 게 좋다는 식의 광고가 많았다고 한다. 많은 광고에서 최고급, 고품격 따위의 문구가 빛을 냈다. 상품의 환경친화성이 나 첨단성이 유난히 강조되기도 했다. 상품에 가격경쟁력이 있어도 광고 에선 이를 크게 취급하지 않을 정도였다. 절약이니, 알뜰이니 하는 문구 는 사랑받는 카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광고 전문가들은 이런 광고 에서 불황의 한파에 쌓인 요즘 세태를 읽는다. 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 소 나운봉(42) 부소장의 말을 들어보자.
“불황이 닥치면 소비행태도 변하게 마련이다. 우선 구매심리가 움츠러든 다. 충동구매나 과소비는 웬만한 소비자가 아니고선 감히 엄두도 내지 못 한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지출은 되도록 삼가게 되고, 꼭 필요하더 라도 구매를 미루는 게 일반적이다. 고급품보다는 값싼 대중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시장에서 콩나물값을 깎듯 물건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워진다. 이른바 절약을 강조하는 광고는 이런 소비자들의 불황심 리를 파고든다.”
시외전화 082 광고는 이런 절약형 광고의 전형을 보여준다. ‘알뜰주부’ 라는 제목이 붙은 이 광고는 생활비를 아끼려 애쓰는 주부들의 생생한 말 을 통해 절약의 미덕을 강조한다. “작은 것부터 아껴야죠?”라는 자막이 흐르면 곧바로 주부들의 경험담이 쏟아진다. “저요? 우선 수돗물 꼭 잠 그라고 해요.” “불 꺼! 불 꺼! 그래요.” “웬만한 빨래는 모아서 하죠 .” 광고는 그러면서 슬쩍 시외전화 082가 돈을 아끼는 데 제격이라는 말 을 끌어낸다. “시외전화요? 082 써요. 9%면 얼만대요.”
이 광고는 ‘생일축하’라는 제목의 광고로 이어진다. 할아버지의 생일날 , 가족들이 안부전화를 하기 위해 전화기 앞에 모인다. 얼굴이 일그러지 도록 몸을 밀착한 가족들은 전화기에 대고 합창하듯 노래를 부른다. “생 일 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하지만 노래는 더이상 나가지 못한 다. 전화가 딸깍 하고 끊겼기 때문이다. 시외전화요금이 비싸다는 걸 풍 자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082로 걸면! 가족들은 합창을 마치고, 돌아가며 한마디씩 축하인사까지 한다. 절약의 지혜가 가족애로까지 포장되는 순간 이다.
절약형 광고는 보통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한다.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소비자들이 충동을 자제하고, 합리적인 구매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물 론 제품의 특성에 따라 감성적 접근이 중시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론 제 품의 경제적 이점을 전달하는 데 역점을 둔다. “티코, 참 많아졌죠! 가 구 2차 중과세 면제에 등록세, 보험료, 고속도로 기름값 걱정도 없으니까 ”(대우국민차 티코), “식용유가 흘러내려 참 불편하셨죠? 새로나온 샘 방지마개가 해결해요”(해표 식용유) 하는 식이다. 티코는 다른 광고에선 “내집마련이 빨라진다”는 카피를 내세워, 티코를 탔을 때 절약되는 각 종 비용을 표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도 많이 팔기 위한 판매전략
절약형 광고는 지난 몇년새 유력한 구매층으로 떠오른 신세대들도 겨냥한 다. 최근 선보인 한 청바지 광고는 주머니사정이 예전같지 않은 신세대들 의 현실을 반영한다. 10대 소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다. 모두 청바 지를 입고 있고, 제법 멋을 부렸다. 한데, 왼쪽 소녀는 잔뜩 찌푸린 얼굴 이고, 오른쪽 소녀는 밝은 미소를 짓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왼쪽 소 녀는 거금을 주고 청바지를 하나 샀다. 그런데 오른쪽 소녀는 그게 아니 다. “난 그 돈으로 청바지 하나 사고, 가방도 하나 사고, 책도 사고, 양 말도 사고, 벨트도 사고, 핀도 사고….”
일반적으로 광고는 소비자에겐 유익한 정보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절약의 미덕을 장려하고, 헤픈 씀씀이를 경계하는 광고는 언뜻 공익에도 부합한 다. 그러나 이런 광고의 목적이 절약을 강조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광고의 목적은 역시 판매이기 때문이다. 절약형 광고는 불황기 를 사는 소비자에게 광고를 보는 지혜도 요구하는지 모른다.
유강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