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경제
1997년03월13일 제 148호 한겨레21

경제의 룰부터 만들자

유진수/ 숙명여대 교수·경제학

노동법 파동, 한보사태 등으로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 가운데 경제의 위기 감이 고조되고 있다.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 만큼 우리의 가치관을 혼란스 럽게 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어제까지 여러 개의 대기업을 거느린 재벌의 총수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부러움도 샀던 사람이 한순간 죄인이 되어 국민 앞에 서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이른바 불법 파업을 주동하였다고 검찰이 사전 구속 영장을 청구했던 사람은 어느 순간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예전과 마찬가 지로 노조활동을 하고 있다.


왜 뇌물 준 사람을 동정할까

이러한 가운데 뇌물을 준 경험을 고백한 어떤 중소기업인에 대해 많은 국 민들이 공감을 나타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분명히 뇌물을 주는 것도 불법이고 받는 것도 불법인 우리 사회에서 뇌물을 주었다는 사람을 비난 하기보다 동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것은 어째서인가? 뇌물의 액수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똑같은 뇌물을 준 대기업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갖는 우리가 이 중소기업인에 대해 공감을 느끼는 것은 뇌물이 작아서일 까, 아니면 힘이 없는 중소기업인이라서일까? 떡값이 몇억원, 몇천만원씩 되면 문제가 되고 그 액수가 적으면 괜찮은 것인가? 도대체 어디까지는 괜찮고 어디부터는 나쁜 것인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전직 대통령의 성공한 쿠데타 또는 금품수수는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실이었건만 문민정부가 들 어서고 몇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위법이라고 한다.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 문제가 되는 일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관행처럼 받아들여져온 행위에 대해 어느날 갑자기 위법이라며 처벌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 다. 지켜지지 않는 어음 결제기간 제한, 아무도 지키지 않는 일부 교통법 규, 금융기관들의 꺾기 등 그 예도 실로 다양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관행에 따라 행동하다가 처벌받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울하다거나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는 않는다. 왜 나만 그러 냐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며, 그같은 행위는 반복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을 돌이켜볼 때, 이러한 혼란 뒤에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본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공통의 룰, 즉 일관성 있는 규범이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따라서 모든 국민이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규범이 없다는 것이다. 관공서를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지만, 우리나 라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이는 일관성 있는 규범이 마련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사회·경제적 규 범을 만들고 정착시키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해야 할 정부 자신부터 기준 없이 왔다갔다하는 것이 현실일진대 국민들이 그런 정부를 믿고 따를 리 도 없다.

우리는 지금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 독재적, 권위주의적 정권 아 래서는 최고위층 자신이 바로 룰이었으며, 그것은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힘으로라도 지켜졌다. 과거의 룰이 사라진 지금 이를 대신할 새롭고 합리 적인 룰이 모색되어야 한다. 일관성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며, 따 라서 잘 지켜지는 그러한 룰부터 확립되어야 할 때인 것이다.


기업활동 규범 빨리 마련해야

경제에서도 룰의 확립이 필요하다. 시장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기업활 동과 경쟁에는 규범이 있어야 하며, 노사관계에서도 노사 모두가 지키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한보사태가 기업활동에서 지켜져야 할 규범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기업활동에 관한 규범이 시급히 마련되어 제2의 한보와 같은 기업이 다시 는 나타나지 않길 바란다. 노동법 개정이 노사관계에서의 새로운 규칙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노동법이 제정되어 노사간 마찰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최소화되기를 기대한다. 아 울러 공무원의 기강이 확립되어 부조리를 고발하는 중소기업인의 안타까 운 외침이 더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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