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한겨레21

돈줄 풀려도 너무 풀렸다

(사진/시중에 돈이 너무 많다.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은은 설명하지만 방만한 통화관리의 부작용 또한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높다.)

“은행에 돈 없다는 핑계를 만들어주지 말아야 한다.”

최근 들어 시중에 자금이 너무 많이 풀려나가고 있다는 지적에 한국은행 의 한 간부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보철강 부도에 따른 연쇄부도 파장을 막으려면 시중은행에 자금이 넉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보부도 이후 적지 않은 돈이 한국은행으로부터 시중은행에 공급됐다.

한달새 풀린 돈만 8조5천억원

한은은 한보부도 다음날인 1월24일 환매조건부 국공채(RP) 매입을 통해 1 조원을 지원한 데 이어 27일과 28일에는 통안증권 되사기로 2조6천억원을 대줬다. 2월3일에도 2조3천억원을 풀었다. 이렇게 해서 설 이전에 풀린 돈만 해도 5조9천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설 자금으로 공급된 4조5천억원 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설을 앞두고 부가세 납부, 한보부도 등 의 일까지 겹쳐 공급규모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설 이후에도 자금공급은 계속됐다. 17일 7천억원, 19일 5천억원, 21일 1조4천억원 등 2조6천억원이 더 나갔다. 한보부도 이후 불과 한달 동안 8조5천억원이나 풀려나간 셈이다. 게다가 한은은 설 전에 나간 돈을 환수하는 데도 소극적이다.

이 모든 것이 은행의 자금사정을 넉넉하게 함으로써 금융시장을 안정시키 기 위한 것이라고 한은은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한보부도 이후에도 회사 채 수익률과 콜금리 등 시장금리는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여왔다.

한국은행은 연초 금융개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고 통화를 신축성있게 공 급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금융개혁의 와중에 금융기관의 보수적인 자 금운용으로 인한 자금시장의 경색을 초래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던 차에 한보부도 사태가 터진 것이다. 그것도 사소한 변수가 아니라 단군 이래 최대의 부도사건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통화공급 증가가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요즘 우리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 다. 마이크로코리아, 한국아피시, 멀티그램 등 중견 중소기업이 줄지어 쓰러진다. 어음부도율과 사채금리는 크게 올라간다. 환율은 폭등하다가 당국의 개입으로 폭락한다. 주식시장도 살아나는 듯하다 말고, 시장 실세 금리도 다시 오름세를 타고 있다. 한마디로 자금시장에 난기류가 돌고 있 는 것이다.

또한 무역적자는 2월 중순까지 이미 50억달러에 이르는 등 계속 악화되고 있다. 부동산 가격 역시 상당히 올랐다. 실업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1 /4분기 성장률은 4%대로 뚝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곳곳에서 경제의 위 기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증상들은 다시 방만한 통 화관리를 부추긴다.

그러나 방만한 통화관리의 부작용 또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한 가 지 두드러진 예가 환율이다.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은 최근 한 때 8백80원대까지 올라갔다. 지난해 말 8백45원 안팎에 머물렀던 것과 비 교하면 35원가량이나 상승한 것이다. 환율의 가파른 상승은 무엇보다도 국제수지 적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월 들어서는 외국인 주 식투자자금의 유입도 부진해져 달러의 공급이 감소했다.

대기업 달러는 꽉쥐고 안풀어 환투기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일부 대기업의 환투기까지 작용했다는 것이 한국은행의 분석이다. 대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내놓지 않음은 물론 사재기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화예금이 지난해 말 14억달러에 서 2월 중순에는 40억달러로 늘어난 것이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이 때 문에 외환당국이 10억달러 이상의 달러를 서둘러 팔아 ‘환율거품’의 해 소에 나섰다.

문제는 이들 대기업의 환투기가 따지고 보면 방만한 통화운용에서 비롯됐 다는 사실이다. 시중에 자금여유가 있으니 대기업들이 달러를 굳이 원화 로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은의 한 임원은 “과거 지불준비금이 부 족한 은행에 과태료를 물리는 등 엄격한 통화관리를 할 때에는 대기업이 달러를 쥐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정부는 연초에 올해 경제운용계획을 발표 하면서 6% 안팎의 저성장을 감수하겠다고 밝혔다. 또 국제수지 적자를 지 난해의 2백30여억달러에서 올해는 1백50억달러 수준으로 줄이고, 물가는 4.5% 수준으로 안정시키겠다고 했다. 경제운용의 기조가 긴축에 가까운 안정쪽으로 크게 기운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연두기자회견에서 올해 재정지출을 1조원 줄이겠다고 말했다.

경제운용의 밑그림이 이처럼 바뀐 것은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계획’이 무리한 부양책 위주로 추진되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지난 해의 엄청난 국제수지 적자도 결국은 신경제가 낳은 쓰라린 결과일 따름 이다. 이런 반성을 거쳐 경제정책의 기조가 변한 것은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보철강 부도라는 큰 악재를 만난 것이다.

이런 판국에 정부가 연초에 세운 안정기조대로 경제를 이끌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한보부도에 따른 성장률의 급격한 둔화와 실업자 급증현상을 방 치해둘 수도 없다. 금융개혁까지 해야 한다. 더욱이 올 연말에는 대통령 선거도 치러진다. 그러니 당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돈을 넉넉하게 공급하 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통화관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은 널려 있다. 우선 한보철강 경 영정상화를 위해 앞으로 줄잡아 2조원은 지원해줘야 한다. 제일은행 등 한보철강에 거액을 물린 은행에는 통안증권 되사기 등의 방법으로 지원해 야 한다. 한보 협력업체 등의 경영안정을 위해서도 상당히 많은 돈이 지 원돼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지원된 돈은 상당 기간 환수되기 어렵다.

정부의 외자도입 확대정책도 큰 부담요인이다. 정부가 사회간접자본 투자 촉진 등을 위해 차관도입을 대폭 허용했다. 자본시장 개방폭도 확대했다. 이에 따라 올 한해 동안 주식자금이나 차관 등의 형태로 들어올 외자는 2 백억달러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증발요인을 통화당국이 어떤 식 으로든 흡수하긴 흡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완벽하기는 어렵다. 또 흡수과정에서 다른 부문의 자금공급은 줄어들게 된다. 때문에 중소기업 등 차관도입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부문에서 자금경색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외환위기 멕시코만의 일이아니다

‘금융의 신’은 우리나라에 엄격한 절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한보 부도 등의 요인으로 실제 상황은 절제와는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 다. 말하자면 ‘금융의 신’이 내린 명령에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 과 나중에 ‘금융의 신’으로부터 또다시 징벌을 받지나 않을까 두렵다. 우리는 지난해 이미 냉엄한 보복을 당한 바 있다.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 계획이 ‘신의 명령’을 거역한 결과 경상적자 급증이라는 응징을 당한 것이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큰 보복을 당하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혹시 멕시코식 외환위기는 아닐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차기태 기자/ 한겨레 경제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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