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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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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프랑스 유학 시절의 덩샤오핑. 중국 출신 유학생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1924년 중국공산당 유럽지부에 입당.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중국 공산혁명의 핵심지도자중 한사람이면서 경제개혁의 주역으로서 영욕 과 부침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을 산 부도옹(不倒翁·오뚝이) 덩샤오 핑은 1904년 쓰촨성 광안현 파이팡촌의 부유한 지주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아들인 그의 인생에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은 파리 유학생활이었다. 1920년 16살의 나이에 당시 근로장학제도인 ‘근공검학’을 통해 프랑스 에 유학한 덩은 파리에서 직공으로 어려운 고학생활을 하며 많은 중국 출 신 유학생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그는 1922 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한 데 이어 2년 뒤에는 중국공산당 유 럽지부에 입당함으로써 정식 당원이 된다. 훗날 중국 총리에 오르게 되는 저우언라이를 덩이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덩은 저우와 함께 공산당 유럽지부 기관지 발행일을 맡고 있었다. 일일이 손으로 새긴 덩의 글씨는 그의 성격을 반영하듯 깨알처럼 작으면서도 한자한자 정확했다고 전해지 는데 이때 덩이 얻은 별명 중 하나가 ‘등사판 박사’다.
16세 프랑스 유학에서 공산주의와 만나
덩은 이어 1927~28년께 아시아지역 청년 공산당원들의 훈련소였던 모스크 바의 동방근로자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됐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뤄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동급생 가운데는 훗날 초대 대만총통이 된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와 베이징지역을 지배하던 군벌 펑위 시앙의 아들 펑퍼눙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개월에 걸친 정치·군사 교육을 받은 덩은 중국공산당의 국공합작 노선 에 따라 펑위시앙의 자문역으로 파견됨으로써 중국혁명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펑은 군벌 가운데 국민당 지지파였는데 소련은 각각 공식 외교루트 를 통해 베이징의 펑 군벌정부를,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조직을 통해서는 광둥의 쑨원 정부를 각각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정변으로 국공합작이 파기되면서 신변이 위험해진 덩은 구사일생으로 베이징을 탈출했다. 그뒤 그는 당의 지령에 따라 남부지역 을 전전하며 지하생활을 하게 되는데, ‘부셴’이란 본명을 버리고 ‘샤 오핑’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덩은 1929년 남서부 광시 지방에서 봉기를 주도하면서 인민해방군의 뿌리 중 하나인 홍군 제7 군과 8군을 조직했다. 그뒤 국민당 정부군에 밀려 장시성으로 쫓겨간 그 는 중국 공산혁명의 산실이었던 ‘징강산 근거지’에 합류해 마오쩌둥과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서 홍군 총부주임이란 요직에 오른 덩은 난산 끝에 사망한 첫번째 아내에 이어 동료당원인 진웨이잉을 두번째 아내로 맞았으나, 농촌을 근 거지로 삼자는 마오의 노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당중앙으로부터 숙청당 했다. 마오는 이때 덩의 지지를 잊지 못해 문화대혁명 기간중 덩을 숙청 하면서도 그의 공산당적만은 빼앗지 않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정치경력 중 최초의 숙청이었던 이 기간중 그는 독방에 연금당했을 뿐만 아니라 자 신을 숙청한 장본인인 당 조직국 비서 리웨이한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비 운을 겪었다. 리와 재혼한 덩의 전 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리테잉은 덩의 각별한 배려 속에 승승장구해 97년 현재 정치국 내에서 국영기업을 담당하는 요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때문에 리테잉이 진과 덩의 짧은 결혼생활 동안 생겨난 자식이라는 설도 있다).
중일전쟁 당시 인맥이 ‘오뚝이’역정 기반
(사진/1939년에 만난 세번째 부인 푸줘린과 함께한 덩샤오핑. 첫부인과 사별하고 두번째 부인을 정적에 빼앗기는 등 그의 가정생활은 혁명의 역정만큼이나 수난으로 점철됐다.)
연금에서 풀려나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한 덩이 다시 일선으로 복직한 것은 마오가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한 쭌이회의를 통해서였다. 대장정 기간중에 열린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은 국민당 토벌군에 대한 군 사적 패배 책임을 물어 당지도부를 축출하고 공산당의 지도권을 잡게 됨 에 따라 덩은 35년 1월 당 중앙비서장에 선임됐다. 역사적인 쭌이회의를 통해 마오세력은 명실상부한 공산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덩은 8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 단장인 류바이청과 함께 눈부신 군사적 활약을 펼치면서 1939년 지금의 부인인 푸줘린을 만났다. ‘류-덩 대군’이란 별명까지 얻은 이 군대는 2 차대전 이후 국민당 정부군과의 내전에서도 ‘제2야전군’으로 확대개편 된 뒤 맹활약하면서 쓰촨·윈난·구이저우·시짱(티베트) 4성을 함락시켰 다. 이 129사단(제2야전군) 계통의 지휘관들은 그뒤 덩의 강력한 지지세 력을 형성했다. 훗날 국가주석을 역임한 리셴녠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 부위원장을 지낸 웨궈칭도 이때 관계를 맺은 인맥 중의 하나였다.
항일전쟁 이래의 화려한 전적으로 정치적 발판을 굳힌 그는 54년 국무원 부총리 및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올랐다. 당시 총리는 저우언라이였고 국 방위원회 주석은 마오쩌둥이었다.
부총리로 경제정책에 참여한 그는 일찍이 50~60년대부터 ‘대약진운동’ 등 무모한 집산화를 시도한 마오의 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하곤 했다.
당시 있었던 주요 회의의 한 장면. 마오쩌둥은 자신의 제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기립할 것을 요구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가운데 덩만이 일어서 자 마오는 웃으며 “덩 동지는 5척단구로 선 키가 앉은 키나 다름없으므 로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순간 덩은 성큼 앞으로 나가 책상 위에 벌떡 올라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토론은 다시 계속됐다.
이렇게 마오에 대한 정면비판을 서슴지 않던 덩은 결국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1년 만인 67년 당시 국가주석인 류샤오치와 함께 ‘주자파’(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당권파)로 몰려 실각당했으며, 이때 그의 아들은 홍 위병으로부터 린치를 받아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덩은 이때의 경험 때문에 전후세대인 청년이나 대학생들의 집단행동에 극 도의 불신감을 갖게 됐으며, 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진압도 그 영향 때 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모두 3차례의 실각·추방과 사이사이의 복직을 겪 으며 장칭 등 ‘4인방’으로부터 핍박받던 그는 76년 9월 마오가 사망하 면서 예젠잉 등 군 원로들의 도움을 받아 4인방을 무너뜨리고 다시 복직 됐다. 81년에는 마오의 공식후계자였던 화궈펑을 밀어내고 중앙군사위원 회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명실공히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굳힌 덩은 이때부 터 적극적인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의 경제발전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 서 덩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면서도 단 한번도 공식적인 국가원수 직 함을 갖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국가원수 직함이 없는 유일한 1인자
그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자리만을 고수하면서 국가주석과 당총서기 등의 요직에 오르지 않은 채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했다. 덩의 치세기간 동 안 그는 사실상 1인자의 자리를 지켰지만 이런 조처는 자신의 은퇴 뒤와 후계문제를 고려한 사려깊은 것이었다고 평가받는다.
90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사임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덩은 ‘남순강화(남쪽지역을 순회강연)’ 등을 통해 경제개혁의 기수로 활약했 다. <신화통신>은 이를 가리켜 지난 2월20일 “개혁과 개방을 통해 사회 주의 현대화 발전의 성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발전시켰다”며 덩의 치 적을 기렸다.
임민 기자/ 한겨레 국제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