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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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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수적인 중국 지식인사회와 달리 젊은층에서는 덩의 죽음을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는 분위기다.)
| 덩샤오핑의 사망을 받아들이는 중국사회는 의외로 담담하다. 덩이 이미 9 3살의 고령인데다 오랫동안 지병인 파킨슨병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그의 사망이 그리 놀라울 것은 없다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러한 차분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중국 지식인사회에는 잔잔한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일고 있다 . 중국 정부의 취재 제한 탓에 익명을 요구한 50대 나이의 베이징대학 국 제정치학과 교수는 덩샤오핑의 죽음에 대한 느낌을 묻는 질문에 선뜻 “ 가슴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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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의 죽음이 갑작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한 시 대에 걸쳐 중국 인민과 운명을 같이한 위대한 영도자의 죽음 앞에서 숙연 한 마음을 금할 수는 없다. 덩샤오핑 동지가 중국에 반환된 홍콩 땅을 밟 아보고 싶어하던 평소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 안타깝다. -덩 생전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덩 동지는 걸출한 정치 지도자이다. 그는 문화대혁명기간 모두 3번의 실 각과 2번의 복직을 거듭하는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포기하 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역사를 엄청나게 후퇴시킨 커다란 실책 이다. 마오쩌둥은 건국 과정에서 큰공을 세웠고 중간 시기의 통치도 보통 정도는 되었지만, 문화대혁명에서는 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덩 동지는 중 국이 잘못 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문화대혁명기간 우리와 함께 고 통을 당했다. 결국 덩 동지는 중국과 인민을 개혁개방이라는 위대한 길로 인도했다.
-덩이 천안문사태를 유혈 진압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안문사태의 유혈 진압은 덩샤오핑 동지의 유일한 실책이다. 그러나 덩 동지는 당시 이미 파킨슨병에 걸려 있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당시 상황은 리펑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주도했고, 발포 명령도 리펑의 주도 아래 결정되었다고 알고 있다. 설사 덩샤오핑 동지가 발포를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보수파의 왜곡된 상황 보고에 따른 결과로 생각된다.
-덩 이후의 정치체제는 안정적이라고 보는가.
=물론이다. 장쩌민 주석의 권력기반은 확고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덩샤 오핑 동지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돼 단단한 정치적 입지를 구축해왔다. 또 개혁·개방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중국 인민은 지금과 같은 안정된 영도체제 아래서 개혁·개방이 지속되길 원한다. 현재 중국에는 정치적 불안이 야기될 만한 조건이나 요구가 별로 없다. 덩샤오핑 동지도 생전에 “과거에는 마오쩌둥 주석이 중국을 이끌었고, 지금은 내가 영도한다고 할 수 있지만, 미래에는 장쩌민 동지가 영도할 것이다”라고 단언하지 않 았는가?
-덩 사후 민주화나 인권 상황 개선에 대한 요구가 거세어지지는 않겠는가 .
=덩샤오핑 동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당분간 중국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중국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 며, 서방의 민주제도가 중국에 적합하다고 볼 수도 없다. 중국의 인권 상 황도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12억의 인구가 모여 사는 중국 에서 가장 중요한 인권은 인민들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는 것이다. 기본적인 생존권의 보장보다 더 급박하게 요구되는 인권이 어디에 있는가 ? 따라서 지금 중국은 정치적 안정 아래에서 개방정책에 더 박차를 가해 야 한다.
이 교수의 말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 지식인 사회의 덩 사망을 맞는 분위기를 잘 반영해준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 로 젊은 층에서는 덩샤오핑의 사망에 대해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는 분위 기가 지배적이다. 베이징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20대 후 반의 한 젊은 지식인은 덩 사후의 민주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다. “한 사람이 평생 이렇게 넓은 중국을 지도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 되 는가? 중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미국식 민주주 의제도가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베이징=김성환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