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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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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반란제조기’였고 덩샤오핑은 ‘모범생’이었다”는 일부 언론의 속설과 달리, 덩은 자신의 실용주의적 가치관을 분명히 드러내면 서 마오의 권위에 정면도전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덩의 거침없는 언행 은 종종 정치적 시련을 자초하기도 했다. 덩은 일찍이 지난 56년 소련에 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났을 무렵부터 마오의 전횡을 거리낌없이 비판 해 왔다.
△“개인이 중요한 문제를 결정한다는 것은 공산주의 정당 건설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며 그런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중과 제휴된 집단지도체 제만이 당의 민주적 중앙집권제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56년 9월)
△“늙은이는 안 된다. 대변도 누지 않는데 변소에 앉혀 놓을 수는 없다. 물러나 지위를 양보해야 하며, 낡은 관록을 자랑해서는 못 쓴다.”(63년 1월. “대변도 누지 않는 늙은이”란 두말할 것 없이 마오를 가리킨다.) △“식량증산만 되면 개인경영도 좋다.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 쥐만 잡을 수 있으면 좋은 고양이다.”(62년 2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으로 유명한 이 말은 농촌에 기근이 닥치자 마오의 농업정책을 비판한 것 이다.)
이 밖에도 64년께 마오의 부인 장칭이 중국고유의 경극을 ‘혁명화’한다 며 정치일선에 나서자 이를 신랄하게 빈정거렸다.
△“경극의 개혁은 찬성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보기도 싫다. 차라리 옛 날 극을 홍콩으로 수출하면 달러는 벌어들일 것이다.”(64년 여름 무렵. 그는 이 말로 장칭에게 미움을 사 2년 뒤 숙청됐다.)
그러나 이토록 신랄하게 마오의 오류를 비판했던 덩도 집권 뒤에는 사회 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드러냈다.
△“우리의 현재와 같은 성과는 중국공산당과 마오 동지의 영도와 떼어놓 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 청년들의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다.”(81년 )
△“봉건사회가 노예제 사회를 극복했고, 봉건사회는 자본주의가 극복했 다. 그렇다면 결국 오랜 시간 뒤에는 사회주의가 결국 자본주의를 극복하 게 될 것이다.”(92년 2월)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