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한겨레21

삐삐, 만인의 전령사

1위 한국, 2위 싱가포르, 홍콩.

삐삐 보급률 세계순위다. 최근 몇년 동안 무서울 정도로 급상승세를 보인 국내 무선호출기 가입자 수는 지난해 말 1천2백69만명, 보급률 28.1%로 2 7%의 싱가포르와 홍콩을 뛰어넘었다. 삐삐는 이제 남녀노소를 막론한 전 국민의 생활필수품이다. 무엇이 온 나라를 이토록 ‘삐삐’소리로 진동하 게 만든 걸까?

국내 무선호출은 지난 82년 12월 첫 서비스가 시작됐다. 당시 삐삐는 호 출을 하면 그저 ‘삐삐삐삐’하는 소리만 나는 먹통 삐삐였다. ‘삐삐가 울리면 어디로 전화를 하라’는 사전 약속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그 나마도 85년까지는 서울지역에만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이런 원시 삐삐 도 아무나 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입절차가 까다롭고 가격도 비싸 기 관원이나 기자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래서 삐삐 자체가 특별한 신분을 나타 내주는 증표 구실을 하기도 했다. 지금과 같이 액정에 전화번호가 찍히는 삐삐는 86년 3월에야 가능해졌다.

삐삐 가입자 수는 80년대 중반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뒤 88년 올 림픽을 기점으로 매년 100%를 웃도는 초증가세를 보였다. 세계에서 유례 를 찾아보기 힘든 이런 초고속 행진에 대해 한국이동통신의 한 관계자는 “경제활동 활성화로 인한 이동인구 증가, 이동중 통신 필요성 증대, 소 득증대 등이 주요인이지만 그만큼 우리 삶이 바쁘고 복잡하다는 증거 아 니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이면에는 사건·사고가 빈번한 우리 현실, 급 한 국민성, 냄비문화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삐삐는 또 이제 단순한 호출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널리 이용하는 음성 사서함을 비롯해 집단호출, 공동호출, 반복호출, 부재중 안내, 메시지 송 부, 팩스 사서함, 예약호출, 증권정보, 자명종, PC호출, 기념일 통보 등 부가서비스가 끝없이 많다. 의외로 저조했던 문자호출 서비스 가입자도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그리고 이젠 삐삐를 통해 프로야구 결과나 그날그 날의 주요 뉴스를 받아보고 날씨까지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삐삐는 특히 10대들에겐 몸의 일부와도 같다. 몇년 전만 해도 12만 원대를 호가하던 호출기값이 지금은 가입비를 포함해 3만~4만원대로 뚝 떨어져 최근엔 뜸해졌지만 청소년들은 한때 삐삐를 사기 위해 삐삐계를 하고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등 온통 야단이었다. 90년대 중반 우리 청소년 문화는 한마디로 ‘삐삐문화’다.

몇대 안 되는 중·고교 공중전화 앞은 쉬는 시간마다 삐삐응답을 하느라 항상 북적댄다. 전화를 거는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의 음성사서함에 녹음 된 것을 듣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내용을 들은 뒤 이들은 또 답신을 역 시 상대방 음성사서함에 녹음 해둔다. 어머니들이 보기에는 한심하기도 하고, ‘무엇이 그리 급해 학교수업 중에까지 삐삐 호출을 받고 난린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여학교 시절 ‘쪽지 돌리기’를 생각해 보 라. 그래서인지 삐삐 수요는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들이 훨씬 높다.

이처럼 삐삐의 비밀보장 기능은 10대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청소년들에게 삐삐는 하나의 해방구와도 같은 곳이다. “우리 집에 전화하지마. 아빠가 아시면 큰일 나” 따위의 대화는 이제는 복고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치열한 입시경쟁 및 놀이공간의 부재가 우리 청소년들을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간다. 당연히 그들만의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고 삐삐는 그들 에겐 ‘마지막 비상구’와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음성녹음을 통해 자신들만의 대화를 나누고 각종 암호와 약어를 통한 의사표현을 즐 긴다. 삐삐 약어가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진 이유도 그들이 전화를 주고받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지만 끼리끼리만의 ‘은어’를 나 누고 싶은 그 또래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업계 관계자들은 앞으로 휴대폰이 대중화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삐 삐를 버리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무엇보다 삐삐는 통화선택권 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통화선택권의 상대방에서 보자면 삐삐가 제때 응답 안 올 때만큼 답답하 고 속터지는 일도 없다. 나중에 사람들은 “지하에 있었다” 또는 “안 울렸다”고 발뺌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93%인 삐삐 수신율이 곧 97%로 올라가고 지하에 간이중계기 설치가 늘어나면서 이제 지하에서도 삐삐가 울리는 시대가 시작됐다. 전령사이기도 하지만 때론 현대판 족쇄이기도 한 삐삐. 그 족쇄가 더 조여온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때론 삐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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