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한겨레21

전화가 이끄는 ‘일상 혁명’

1876년 2월15일 오후 1시 미국의 알렉산더 그레햄 벨이 워싱턴 특허청에 전화기 특허를 출원한 이래 1백20년이 지났다. 그 이후 전화는 다양한 형 태로 끝없이 발전했고 그 수도 꾸준히 늘어나 전화의 발달에 따라 우리 생활패턴과 사고방식까지 좌우되고 있다.

예전 이장댁 대청마루에 놓인 전화 한대가 온 마을사람을 연결해 주거나 텔레비전과 함께 전화가 재산목록 1호로 올랐던 시절은 아득한 석기시대 의 일처럼 기억된다. 국내 전화시설 수는 지난 96년 말 현재 2천2백78만9 천대, 인구당 보급률은 43%다. 여기에 이동전화 가입자가 3백18만5천명으 로 95년 말의 1백64만1천명에 비해 95% 증가했다. 전화는 이제 유·무선 을 막론하고 개인 휴대품이 되고 있는 세상이다. 어디에나 편재한 전화는 무소불위의 기능도 갖고 있다.


무소불위의 기능으로 신종사업 개척

전화 한 통화로 집안에 있는 전자제품과 연결해 밥을 짓고 난방장치를 가 동시키는 일은 이젠 구문(舊聞)이다. ‘나는 오늘 아침 8시에 집에 앉아 5백만원을 대출받았다’. 한 시중은행이 ‘텔레뱅킹론’(전화대출) 세일 을 벌이면서 내놓은 광고문안 중 하나다. 돈이 필요하면 전화 한 통화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월말만 되면 북적거리는 은행창구 가 한산해질 날도 멀지 않게 된 것도 전화 때문이다. 또 최근엔 수백명의 회원들에게 한꺼번에 같은 통화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153 전화 동아리 서비스가 등장했다. 연락방에 올려놓은 각종 전달내용은 회원들의 무선호 출기에 103번이 찍히면서 통보된다. 그리고 컴퓨터가 자동으로 원하는 시 각에 전화를 걸어 영어를 가르쳐 주는 신종 전화 비즈니스, 비상 전화연 락을 대행해 주는 ‘콜통신’ 업체도 등장했다.

특히 97년 한국은 신통신 개화기, 통신 무한자유시대로 돌입하는 시기다. 주머니 공중전화 CT-2(발신전용 휴대전화), 이동중인 차량 안이나 야외에 서 노트북 PC나 전용단말기 등을 이용해 무선으로 정보를 송수신할 수 있 도록 해주는 무선데이터 통신, 동시에 여러 명이 통화할 수 있는 무전기 를 발전시킨 TRS(주파수 공용통신) 서비스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다. PCS(개인휴대통신) 사업자들도 내년 1월부터로 계획된 서비스를 앞당 겨 연말부터 제공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기존 이동전화가 음성 통화만 가능한 데 반해 PCS는 2000년 이후 동영상 그래픽 데이터까지 전 송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통신이 가능하다. 1백여년 통신독과점 시대가 마감되면서 지난해 6월, 7개 신규통신 분야에 무려 27개 업체가 새로 통 신서비스 업체로 선정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통신서비스가 이처럼 속속 등 장하고 있다.

이런 하드웨어적 측면뿐 아니라 전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생상담원 노 릇도 해왔다. ‘남성의 전화’‘여성의 전화’‘십대들의 전화’‘노인의 전화’ 등을 통해 현대인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구체적인 도움 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은 또 전화를 통한 만남을 꿈꾸면서 국제전화 폰팅까지 눈을 돌리 게 됐다. 이미 국내에 성행하고 있는 700 서비스가 오락·교양프로그램에 치중했다면 국제전화 폰팅은 다중통화가 가능하고 국내로부터 아무런 제 한도 받지 않는다는 점이 사업자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했다. 한국교민으로 보이는 수십여개 사업자들이 해외에 자동응답시스템을 설치해 국내 초· 중·고생과 20대를 대상으로 전화미팅, 이성교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제 음성정보 규제가 거의 없는 이스라엘, 캐나다, 스웨덴, 몰 도바,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등 국제전화 폰팅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에 대해 전화요금 정산액이 95년 총 15억원에서 지난 96년 무려 70억 원 수 준으로 급증했다. ‘사랑의 대화를 나누세요’ ‘쉿! 애인이 생겼어요’ ‘짜릿한 만남을 원하세요’ 등 스포츠신문에 게재된 자극적인 광고문구 를 따라들어간 국제전화 폰팅공간 속에는 컴퓨터 채팅처럼 남녀간의 다중 통화가 이뤄지기도 하고 자신의 신상명세를 녹음시켜 놓을 수도 있고 그 냥 대화를 엿들을 수도 있다.


각종 전화서비스 범람… 정신질환 유발도

“두려워하실 필요없습니다. 당신이 상상하신 것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이 광란의 전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등의 녹음된 목소리가 맨처음 들려오지만 다중통화의 경우 남자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홍일점인 여자의 경우도 그 소속이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음성을 녹음해 놓은 여자들도 하나같이 목소리가 매끄럽고 대사를 읊듯 간드러진 교태를 부리는 탓에 ‘조작’이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꼭 이런 국제전화 폰팅이 아니더라도 전화를 매개로 한 폰팅은 주 주클럽의 <16/20>이 나올 만큼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전화로 사람 을 소개받고 전화로 교제를 하고 그러다 보니 맞대면보다 전화 속 목소리 가 더 친근한 세상이 되고 있다. 이제 크리스마스나 새해가 되어도 카드 가 아닌 삐삐 신년인사가 유행한다. ‘사랑하는 ~에게’라고 시작되는 연 서가 자취를 감추고, ‘아버님 전상서’라는 글씨도 사라지고 있다. 겉봉 의 필체를 보고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지 알아맞히는 설렘도, 집앞 우편함 이 텅 비었다고 실망할 사람도 이젠 없다. 전화로 인해 그 자리가 사라진 지는 이미 꽤 됐다.

영화 <데니스는 통화중>은 현대사회 인간관계의 허구성, 익명성을 신랄하 게 풍자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7명의 남녀 뉴요커들은 한 도시에 살 면서 알음알음으로 알게돼 수년간 거의 매일 전화통화를 나누는 사이면서 도 서로 얼굴 한번 대한 적 없다. 이들은 길을 가면서, 화장실에서 볼 일 을 보면서도 전화기를 붙들고 쉴 새 없이 떠든다. 이들은 전화로 소개받 고, 전화로 사랑을 속삭이고, 전화로 섹스를 하기도 하지만 정작 만나는 것은 극도로 두려워한다. 파티를 열어도 아무도 오지 않고 초청한 집 앞 까지 가서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다. 매일 전화통화를 했던 연인도 그 집 앞에서 서로 아는지 모르는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 외부와 교통을 시도하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내면세계로 더욱 움츠러드는 현대인의 허구적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 미국의 폰섹스업체를 소재로 한 영화 <걸식스>도 이와 비슷하다. 흑인 여성 주디는 손님에 따라 백인도 되고, 인생상담도 하고 가상섹스를 벌이 기도 한다. 감수성이 풍부한 주디는 단골손님 가운데 한명과 데이트 약속 을 하고 나가지만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 모른 채 엇갈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디가 옛 남자친구와 포옹할 때 전화기가 공중에서 비오듯 떨 어져 박살나는 장면은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를 분명히 나타내 다.

정신과의사 김정일씨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전화의존성에 대해 “외로워서 ”라고 단정지었다. 그는 “인간은 원래 대인의존성이 강한 경향을 지니 고 있지만 점점 개체화되고 있는 현대사회가 이를 용납치 않는다”면서 “특히 농경사회로 의존성이 강한 한국인의 경우 유목문화적인 산업화 사 회에서 더욱 외로움을 타게 돼 전화를 어머니의 대리물처럼 인식하게 된 다”고 말했다.


인간적인 기기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일본에선 직장인들 사이에 휴대폰 사용이 일반화되며서 심신이상까지 유 발하는‘휴대폰 증후군’이 심각하게 번지고 있다. 샐러리맨들은 “휴대 폰을 가진 뒤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숙면을 할 수가 없다” “매사에 의욕 이 없고 귀찮다”는 등의 증상을 의사에게 호소한다. 우리도 차이가 있지 만 가슴팍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화벨이 울릴 때 심장이 ‘ 뜨끔’하는 기억을 한번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증상이 심하면 단순 히 휴대폰을 지니고 있기만 해도 ‘언제 전화가 걸려올 것인가’라는 막 연한 불안감이 늘 따라다니게 되는 정신질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종 의 테크노 스트레스다. 일본과는 또 사정이 다르겠지만 이동전화 보급률 1~4위인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가 자살률에 있어서도 역시 세 계 최고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또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전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 현대인이지만 조영남의 노래 <도시여, 안녕>처럼 “신 문, 잡지도 없고, 전화도 없는” 그런 세상에서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것 도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 중 그래도 사람내음을 조금이나마 맡을 수 있는 것은 ‘전화’ 아닌가? 그 기계보다 가느다란 선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는 인간 에 대한 애정을 회복한다면 전화는 가장 인간적인 기기가 될지도 모른다.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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