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한겨레21

황장엽 망명, 통일을 연습하자

(사진/통역으로 수행하던 한음전(조총련 한덕수 회장의딸.맨 왼쪽)씨도 함께 했다.)

이삼열/ 숭실대 교수·철학

중국에서 망명을 신청한 황장엽 비서가 곧 서울로 올 것 같아 가슴이 설 렌다. 혹 미국이나 유럽을 거쳐서 올 지 모르지만 분명히 남한으로 오게 될 주체사상의 대가 황장엽 선생을 우리는 어떻게 맞아야 할까. 황 비서 가 갖고 올 정보 보따리에 군침부터 삼키는 당국자들, 주체사상의 자수와 망명이라고 환성을 지르려는 사람들, 소신과 논리를 가진 북의 사상가가 오히려 남한사람들의 반공심리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는 대공 전문가들, 나름대로 설레며 계산에 분주하리라 본다.

도대체 황 비서는 어떤 사람이며, 망명동기는 무엇인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추측과 설이 무성한 이 즈음, 나는 10년 전에 만났던 그를 회상하며, 당시의 메모를 뒤적이면서 황 비서에 대한 나의 인상을 공개함 으로써, 국민적 관심사인 황장엽 비서를 바르게 인식하는데 한편의 도움 이 되고자 한다.


황 비서, 삼척공장에서 노동한 적도

아직도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고 모험이었던 시절, 일본에 있는 유 엔대학이 ‘공동안보와 국가의 역할’이란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나 와 황 비서를 남북한의 발제강연자로 초청하여 공식으로 대면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여기에는 세계적 평화운동가며 도쿄대 국제정치학 교수였 던 사까모도 선생의 노력과 수고가 컸다. 남북회담도 단절된 상태였으니, 밖에서 학자교류라도 성사시키자는 평화운동적 관심에서 사까모도 교수가 여러차례 북한을 방문해서 처음으로 황장엽 비서를 일본으로 초청해 내었 던 때였다. 요코하마의 어느 호텔에서 87년 12월 13∼15일에 열린 국제회 의에서 황 비서와 나는 ‘한반도의 공동안보’란 같은 제목으로 30분씩 발제강연을 했다. 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안보를 위해 정부가 선제적 무기감축과 평화구축에 나서도록 민간인들이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 했다. 이와함께, 나는 남한에서 교회와 학생들을 움직여 평화운동을 할 테니, 황 비서는 북의 노동당을 움직여 남쪽과 대화에 나서게 해 달라고 했다. 황 비서는 나의 발제를 칭찬해 주며 전적으로 동감이라고 공석에서 표명해 모두들 놀랐다. 다른 국제회의에서와 달리 북쪽 대표로 온 황 비 서는 전혀 남한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큰 설전이 벌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참가자들은 남북한의 토론이 너무 평화롭게 진행돼 오히려 놀랐 다. 황 비서의 유연함과 너그러움에 감동하여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 어 따로 만나자고 제의했다.

밤 8시가 넘어 통역으로 수행하던 한음전(조총련 한덕수 회장의 딸)씨가 호텔방으로 나를 불렀다. 마침 같은 층의 옆방이어서 편하게 왕래할 수 있었다. 많은 정계손님을 맞는 바쁜 일정에 조총련의 청년들 10여명이 방 문앞을 지키는 삼엄한 분위기였는데도 황 선생은 13일과 15일 이틀 저녁 을 밤11시가 넘도록 나와 함께 북한차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 었다.

나는 처음에는 공작을 당하는 게 아닌가 두려움도 있었지만 대화가 진행 되며 황 비서는 어떤 목적성 없이 여유있게 할아버지가 이야기하듯 말해 서 나는 안심할 뿐 아니라 호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황 선생은 해방전 평양상업학교를 나온 뒤 일제의 징용에 끌려나가 강원 도 삼척의 어느 공장에서 1년간 노동한 적이 있다고 했다. 북으로 올 때 서울을 잠시 들려 구경한 적이 있다며,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까 진 사회주의 사상을 전혀 몰랐다는 황 비서는 해방 뒤에야 이 사상에 접 했다고 했다. 49년부터 53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에야 사 회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65세로 노동당 외무비서였고, 사회과학자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지금은 직접 연구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철학·종교에 관해 진솔한 토론

철학교수인 나와 이야기해 보자며,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주체철학에 대해 장시간 토론했는데, 칸트, 헤겔, 쇼페하워, 니체, 키에르케고르, 하이데 거, 사르트르 등 서양 철학자들을 인용하며 강의하듯 말했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아닌 철학들에 관심을 가지며, 이런 것들을 다 포함해서 발 전시킨 사상이라고 했다. 인간이 중심이며 주체라는 생각은 중세를 벗어 나면서 계속 발전했는데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서 너 무 유물론만 보았고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고 했다. 생산관계가 의식을 좌우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정신이 더 중요하 다고 황 비서는 강조했다. 평등한 사회제도를 만들면 다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사회는 사랑이 있어야 돼요. 모두 내 가족처럼 보 살펴 주는 사랑이. 평등과 사랑이 결합하면 이상적 사회가 되지요”라 했 다.

“그러면 기독교 사상과 같지 않습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기독교는 그런데 사회를 너무 몰라요. 사회를 평등하게 하려면 이것도 과학적으로 해야 하는데, 사랑, 사랑만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요.” 주체사상은 이것을 과학적으로 실천해 보자는 사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종교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엔 종교가 너무 미신 처럼 되고 계몽되지 않아서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세상을 개선할 생각을 안하니까, 마르크스주의가 반대했지만, 오늘날엔 종교가 얼마나 좋은 일 을 많이 합니까? 인민을 잘 살게 하려고 노력하는 종교는 얼마든지 좋습 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도 이 성적 요청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종교철학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했다. “공산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 허무의 문제를 해결 해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종교가 어쨌든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지요. 그건 개인에 따라 자유롭게 해야지요.”

나는 잠깐의 대화를 통해 속단인지 모르지만 황장엽 선생이 결코 교조적 이며 독단적인 공산주의자나 유물론자가 아님을 확인했다. 이만큼 온건하 며 합리적인 사상가가 북한체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데 오히려 안도감 마저 느꼈다.

황 비서는 경제적으로 발전한 남한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부럽게 여긴다고 솔직히 말했다. 북조선은 농사지을 땅도 적고 이천만의 인구를 먹여 살리기가 어렵다고 했고, 서해안 간척지 30만평이 개간되면 겨우 식량자급이 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비날론 공장이 있어 옷감 은 문제없지만 질은 좋지 못하고, 수송차량이 모자라 공장들이 어렵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남한처럼 외국원조를 받으면 좋겠는데 불순한 조 건이 붙는 차관들은 받을 수가 없어 자력갱생에 애를 먹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나 인민들이 필요한 건 기본적으로 다해놓았고 더 가난 한 아프리카 나라들에 원조도 주고 있어, 못사는 나라들에 비하면 큰 손 색은 없다고 말했다.


북한땅 개혁론자, 간첩으로 몰린다?

많은 이야기와 토론내용을 다 적을 수 없지만, 나는 이 만남에서 황 비서 가 북한을 합리적으로 온건하게 개혁할 수 있는 사상적 지도자라는 인상 을 받았다. 언젠가는 다시만나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인식과 시각을 교정하 면서 통일과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제 황장엽 선생의 망명으로 북한체제속에 합리적이고 온건한 개혁주의 자들의 설 땅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더구나 황 비서를 세뇌 하여 북한을 붕괴시키고 흡수통일하려는 전략에 활용하지 않을까 걱정스 럽다. 북한땅의 합리적 개혁론자들이 모두 남한의 간첩으로 몰려 희생되 는데 기여하는 결과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황장엽 비서의 주체사상이 모두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동 독에서 망명한 롤프 비어만이나 로버트 하버만이 서독에 왔을 때 동독체 제를 비판하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자유롭게 말하도록 허용했던 것처럼, 황장엽 선생이 소신대로 주체사상이나 북한문제를 자유롭게 말하도록 허 용하는 여유를 보일 때, 오히려 통일의 길이 앞당겨지리라 믿는다.

황 비서의 서울거주가 북을 바로 알고 함께 사는 공생적 통일과정을 미리 실험해 보는 연습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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