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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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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2년 8월말로 기억된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의 대통령후보로 선 출돼 전국을 누비면서 사실상의 대통령 선거운동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김영삼 대표는“지도자는 개인보다는 국가, 사익보다는 공익을 중시 해야 한다. 나도 내 아내와 가정을 소중히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나라를 더 사랑한다”고 절규했다. 김 대표는 강릉에서 열린 민자당의 지구당 개 편대회에 참석해 평소답지 않게 자신의 국가관과 가족관을 거론하면서까 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확정발표했던 선경그룹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 결정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김 대표의 이날 발언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불려 모든 재벌들이 군침을 삼켰던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노 대통령의 사돈재벌인 선경그룹으로 결정한 것은 부도덕하다는 메시지 를 담고 있었다.
도덕 정치의 구현을 유난히 강조했던 김 대표는 배수진을 치고 백지화투 쟁을 밀어부쳐 선경의 사업권 자진반납을 유도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4개월뒤에는 마침내 대망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도덕성을 최고의 무기로 삼았던 김 대통령은 그러나 잔여임기를 불과 1년 남겨두고 있는 시점에서 둘째 아들의 도덕성 문제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 를 맞고 있다. 역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기업인들로부터 단돈 1원 도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김 대통령은 이제 왜 자신의 아들이‘젊은 부 통령’‘얼굴없는 실세’로 불리면서 단군이래 최대의 추악한 금융스캔들 의 배후인물로 의심받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것 이다.
현철씨의 문제는 한보의혹의 배후설에서 끝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 성이 있다. 권력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와 안기부를 둘러보자. 지난 대통령 선거때 현철씨가 이끌던 사조직의 요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내각은 또 어떠한가. 역시 그가 천거했다거나 특수한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요직을 점령하고 있다. 권력의 사병화인 것이다. 김 대통령의 비극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자만한나머지 권력의 사물화를 방치 한 데 있다. 그 중심에 혈육인 현철씨가 있음은 물론이다. 사병화된 권력 은 견제장치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증식한다. 또 권력의 주변에 정 치적 습지대를 조성해 불법과 타락의 먹이사슬을 구축한다.
김 대통령이 진정으로 아들과 가족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한보관련 의혹을 한점 부끄럼없이 밝혀야 한다. 청와대로 수사진행상황을 일일이 보고하면 서 처리지침을 지시받았다는 검찰의 무혐의 결론을 내세우면서 아들의 결 백을 주장한다면 그 몫은 다음 정권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수서배후설도 결국 4년뒤에는 진실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국민 들은 4년전 노태우 대통령에게 가족보다 국가를 더 사랑한다고 부르짖었 던 김 대통령이 아들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주시하고 있다.
장정수/ 한겨레21 취재1팀장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