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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희망의 사람들 |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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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우리는 노동당이 간호사들과 농민과 공무원들이 어우러지는 당으로 산업별.직능별 벽을 허물고 싶다." 95년 3월 워싱턴에서의 병원노동자들 시위.)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노라.
그들의 행진을 보라.
모든 압제자들이 떨고 있구나.
…
압제자의 법 같은 건 쓸어버리고,
만인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파업을 벌였다. ‘8시간 노동’ 쟁취를 목표로 했던 이 파업은 비록 경찰의 폭력적 탄압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실패했지만 , 이후 노동운동을 이끌어갈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현재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5월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는 것은 바로 미국 노동자들의 이런 선 도적인 투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노동운동에서 이런 전통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 다 노조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아졌다. 이에 따라 노조가입률은 최대 수 준이었던 54년의 34.7%에서 지난 96년에는 14.9%로 떨어졌다. 공공부문을 제외하면 그나마 10%도 채 안 된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노동운동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전체 노동인구의 16.5%를 차지하고 있는 16~24살 노동인구의 노조가입률은 5% 남짓이다.
참여 노조원 1백만명 넘어서
의회 내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이 보호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당이 비록 ‘ 노동자의 의견’에 귀 기울인다고 하지만, 다운사이징(조직축소)이니 노 동자 복지축소니 하는 데서는 공화당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국가경쟁력 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걸고서 말이다.
그렇지만 ‘희망찾기’가 미국 내에서 모두 사라져버린 건 아니다. 보스 턴 시내 프랜드가에 있는 ‘미국 노동당 뉴잉글랜드 지역당’도 바로 미 국 노동자들을 위한 새로운 희망찾기를 시도하고 있는 곳 중 하나다. 그 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미국 노동당이라니, 미국에도 노동당이 있단 말인가.’ 물론 있다. 미국 노동당은 지난해 96 년 6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시에서 창당대회를 가졌다. 대회에는 40개 지구당 조직과 45개주의 3백여 노동조합을 대표해 약 1천4백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뉴잉글랜드 지역당은 이중에서도 매사추세츠주를 비롯해 뉴잉 글랜드 6개 주의 지구당 조직 전체를 통괄하는 조직체다. 노동당에서는 워싱턴 본부 다음으로 큰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렇듯 큰 구실에 비해 지역당 사무실은 초라했다. 변호사들의 합동법률 사무실이 즐비한 이곳에서 방 한칸을 빌려쓰고 있는 처지였다. 단지 노동 당 창당 기념포스터와 책상 밑에 쌓여 있는 당 기관지, 그리고 바쁘게 돌 아가는 팩스만이 이곳이 노동당 지역당임을 실감케 한다. 지역당 위원장 은 에드문트 브루노(49). 그의 경력은 여느 단체장처럼 화려하지 않다. 자신이 힘주어 말하듯이, 그저 미국의 ‘보통사람’일 뿐이다. 브루노는 10대부터 전기공으로 일하다가 25년 동안 ‘전기·라디오·기계공연합노 동조합’(UE)의 조직활동가가 됐고 지난 87~92년에는 이 노조의 전국대표 를 지냈다.
브루노에게 “어떻게 미국 노동당 조직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고 물어 봤다.
“거대 독과점자본에 팔려가는 노조관료의 한 사람이 돼가는 자신의 모습 이 싫었습니다. 갈등하고 있는데 앤토니 매조키를 만났죠. 노동당 활동을 시작한 데는 그의 영향이 컸습니다.”
매조키는 ‘석유·화학·원자력공업국제노조’(OCAW) 본부에서 오랫동안 재무국장을 맡아오던 노동운동가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노동운동계에서 반세기 동안 잔뼈가 굵은 탓인지 노조일이라면 크고 작은 모임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닙니다. 우리들은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70년 대 중반 석유파동 이후 실제 임금의 상대적 저하, 제3세계로의 자본수출, 실업률 증대에 기존의 노동조직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자 기층 노동자들 의 삶은 나날이 어려워졌습니다. 또 잦은 정리해고 탓에 노조가입률도 눈 에 띄게 줄어들었죠. 90년대 들어 UE와 OCAW 등을 중심으로 노동당 발기 에 앞장섰고 우리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95년이 되자 노동당 결성 취지에 공감하는 노조들이 부쩍 늘 어났다. 미국 공무원 노조, 광산 연합노조를 비롯해 듀퐁, 직물공정, 서 비스업 등 각종 노조가 잇따라 노동당 발기에 동참했다. 브루노는 매조키 와 함께 마침내 96년 6월 노동당 창당대회장 단상에 서게 됐다.
“창당 직전까지 참여 노조의 노조원이 총 1백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우리 는 노동당이 간호사들과 농민과 공무원들이 어우러지는 당으로 산업별· 직능별 벽을 허물어뜨릴 당으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흑인·황인 노동자도 함께 손 맞잡고…
(사진/웅크린 노동자. 미국의 노조가입률은 바닥을 기고 있다. 공공부문을 제외하면 그나마 10%도 채 안 된다.)
대회장의 포스터는 노동자들이 ‘빵과 장미’를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 장미는 ‘사람다운 삶’을 의미한다. 1910년대 전투적인 세계산업노동 자(IWW) 조직이 주도한 매사추세츠주 로렌스 직물노조 파업 때 등장했던 바로 그 장미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백인 노동자뿐 아니 라, 흑인과 황인 노동자도 손에 손을 맞잡고 등장한 것이다. 대회의 기치 도 노동당의 갈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보스들은 두 정당(민주당과 공화당)을 갖고 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정당을 가졌다.” “앞날에 대한 가장 확실한 예측은 우리 노동자들이 만 들어가는 것이다.”
매조키는 워싱턴의 본부로 가고, 브루노는 전기노조에서 지구당 운영비와 보수를 받기로 하고 뉴잉글랜드 지역당을 맡았다. 노동운동가에서 정당활 동가로 변신한 브루노의 정치관은 남다르다.
“저도 원래 정치란 직업정치인이나 정치꾼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 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몇 차례의 선거과정을 지 켜보면서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도 자기 정당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래서인지 그는 철저하게 대중정당을 지향한다. 그는 지역에 산재해 있 는 개별노조들은 물론 지역 주민단체, 나아가서는 개인 노동자들도 접촉 하고 있다. 그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사방에서 문의전화가 오고 ‘메이데이의 산실’ 시카고에서 지구당 결성을 알리는 팩스가 날아온다. 브루노는 기층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술집이든 취미단체든 가리지 않 고 닥치는 대로 찾아간다. 브루노의 이러한 접근은 노조가입률이 15%를 밑돌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노조원조차 노조지도부에 대해 냉소 적인 미국 노동운동, 또 85%의 비노조원 노동자들이 자기들끼리의 ‘비공 식 사회’를 만들어온 미국사회에서 ‘노동자의 정당’이 살 수 있는 것 은 바로 비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브루노와 함께 사무실에 있던 노동당원 제프 부스(35) 역시 대중성을 강 조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부스는 하버드대학 와이드너중앙도서관 문서분 류실에서 일하는 사무노동자다.
“1천3백만명 조직원을 자랑하는 미국 최대의 노동조직인 ‘미국 노동총 연맹-산업조직평의회’(AFL-CIO)도 기층 노동대중과 유리돼 있습니다. 전 국조직이 지역조직과 무관하고 지역조직끼리도 연대가 되지 않습니다. 앞 으로 노동당은 이런 틈새를 메우고 수평-수직연대를 이루어낼 것입니다. ”
그러나 ‘기층 대중조직 작업’이 말처럼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진보적 노동계 안에서조차 비관론이 지배적이다. “노동당을 만들려 하기 전에 노동운동부터 활성화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브루노나 부스는 노동운동 활성화는 “노동자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며 노동 당은 바로 그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하나의 어려움이 있다면 노동당 결성에 대해 AFL-CIO가 현재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당을 찬성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브루노가 말을 잇는다.
“몇 년 전이라면 AFL-CIO는 노동당 결성을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지금 대놓고 반대할 수 없는 것은 그들도 이제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 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줄곧 민주당을 지지해왔지만 건진 것이 없었던 탓이죠.”
노동당의 정치이념에 대해서 브루노는 한마디로 탈이념을 주창한다.
“지금 미국에서 생디칼리스트나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 한 예로 우리 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누구나 미국 노동운동의 선구하면 유진 뎁스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1901년에 미국 사 회당을 조직하여 1950년대까지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을 이끈 그 사람은 내 어린시절 우상이었죠. 그래서 나는 셋째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가브리 엘 뎁스 브루노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조차도 자기 이름의 뜻을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공공교통 개선’ 철로걷기 운동
그렇다고 아무런 지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브루노는 “당 홍보전단에 선정된 5명의 노동운동가가 노동당의 정치적 지향을 보여준다”고 지적한 다. 여기에는 유진 뎁스를 비롯해 19세기 말 급진적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노동자 기사단’의 명연설가 마더 존스, 연합 광산노조의 지도자로 ‘ 공장점거 연좌농성’ 투쟁방식을 도입한 존 루이스 등의 이름이 나온다. 이들 5명을 묶는 하나의 정치이념은 없지만, 인종·성별·직종을 넘어서 려는 현재 노동당의 고민도 들어 있는 듯하다.
노동당은 현재 즉각적인 정치행동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오는 98년 선 거에도 극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독자후보를 낼 계획이 아직 없다. 하 원 등 전국대표는 전혀 생각도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브루노는 다시 기층 대중조직을 강조한다.
“지난해는 당원 확충기간이었습니다. 올해는 기층조직을 기반으로 일반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는 방향으로 전진해갈 것입니다. 계획대로라면 98년 에 몇 개 선진지역에서는 노동당 독자후보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정치에 무관심한 비조직 노동자들을 먼저 정치과정에 참여시키는 조직 활동이 급선무입니다.”
미국 노동당의 앞날에 어려움도 많아 보였지만, 에드문트 브루노와 제프 부스의 표정은 밝다. 노동당 지역모임에 나온 당원들의 출신을 보니 프랑 스를 비롯해 푸에르토리코, 포르투갈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민 노동자 가 아직도 많은 미국에서 지난 시절의 인종갈등에 시달렸던 미국 노동운 동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당원들의 의지는 더욱 뚜렷하다. 비대관료 화된 노동조합 지도부를 넘어서 조직화되지 않는 노동자 사이의 비공식 조직이나 개인 노동자의 조직화에 힘을 쏟는 모습도 활기차 보인다.
브루노나 부스는 당 교육안짜기에 바쁘다. 보스턴 지구당은 3월에 다른 단체들과 연대해 공공교통의 개선을 위해 철로걷기 운동을 벌일 작정이다 . 그리고 5월1일 노동절에는 신세대에게 ‘노동의 의미’를 전파할 것이 다. 1886년 시카고 노동자들의 ‘피의 노래’가 아닌 노동당의 ‘빵과 장 미’를 들고….
보스턴=윤성주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