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한겨레21

“변절자여 가라, 쌀이여 오라”

(사진/김정일 정권은 식량난과 경제난 속에서 황장엽 망명에 유연하게 대응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한국 망명신청을 둘러싼 북한의 대응은 한마디로 이례적이다. 황 비서가 서울행 비행기를 탈 것인지가 여전히 불투명한 상 황이지만 북한이 이번 망명사건을 둘러싸고 예상과 달리 ‘유연하게’ 대 응하면서 내부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조짐이 없는 등 성숙함(?)이 눈에 띄 기 때문이다. 전략적인 후퇴인가 아니면 이제 웬만한 체면 손상에는 무감 각해진 때문인가.


“소모적 긴장 필요없다” 현실적 인식

북한 내부소식에 밝은 전문가들은 옛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 붕괴-김일성 사망-2차례에 걸친 대홍수를 겪으면서 북한 지도부가 점차로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는 데 나름대로 익숙해져 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다.

물론 북한은 황 비서 망명사건이 발생한 초기에 ‘한국에 의한 납치’(2 월12일, 중앙방송)로 규정해 황 비서의 한국망명을 저지하기 위한 특수 요원을 파견하는 등 긴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갑자기 발생한 만큼 최소한의 자위조처 혹은 사실 확인차원의 대응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발생 5일째인 2월16일부터 나오기 시작한 북한의 반응은 “비 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2월16일 중앙방송, 18일 김정일 인용 중앙방송 ), “그(황장엽)가 망명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변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 절자는 어디든 가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2월17일, 북한외교부 성명), “북한 정부의 황 비서 망명 용인”(2월18일, 김정우 대외경제위원회 부 위원장) 등으로 이어진다. 관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북한의 입장을 ‘대미 ·대중관계를 고려한 조처’로 평가하면서 북한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 한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황 비서의 망명 신청 소식이 전해진 며칠 뒤인 2월15일 북한경제인 들의 출국을 전면금지하고 한국을 포함한 외국과의 경제무역관련 업무도 중단시켰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당시 북한의 이러한 조처는 해외출장이 잦은 북한인들의 연쇄 이탈을 막는 동시에 대외무역, 외교 종사자들에 대 한 전면적인 검토작업에 착수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의 대북교역업체들은 2월17일 이후 북한의 무역일꾼들은 우리쪽의 미 팅 요청에 대해 크게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확인해 주었다. 이 때 베이징에 있는 북한 경제·무역 관리들의 첫반응은 “황 비서가 없어 도 우리가 하는 일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냉정한 반응은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북한이 자체적으로 만든 ‘위기 타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여 왔 으며, 주민들에게도 과거와 달리 경제적 어려움을 솔직히 알려 난국을 함 께 헤쳐나갈 것을 호소해 주민들도 어느 정도 호응해 온 게 아니냐는 관 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북한을 다녀온 재미교포 박아무개씨의 주장이 시선을 끈다. 박씨의 말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는 주민들에게 “온갖 간난 속에서 사회주의를 지켜가고 있는 것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질 자랑스런 것이다”고 선전하고 있으며 일부 주민들 스스로도 “옛 소련과 같은 큰 나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졌는데 우리 나라는 연속적 인 자연재해까지 겹치는 등 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회주의를 지켜가 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또한 박씨는 “북한 주민들이 생각하는 3대 난관은 큰물피해(홍수)로 인한 식량난, 미 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경제봉쇄와 정치군사적 위협이다”면서 북한 지 도부는 이 3대 난관을 이겨내는 데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고 전했다. 그 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3대 난관은 현 김정일 체제의 사활을 쥐고 있는 아킬레스건일 뿐 아니라 북-미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국면에서 터진 황 비서사건은 김정일 지도부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 은 분명하나 앞서 지적한 ‘현안’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황 비서를 둘러 싸고 소모적인 긴장국면을 조성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에 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경제제재 완화’ 미국에 큰 기대

3대 난관을 뛰어넘기 위해 우선 북한은 올초 내부적으론 자연재해로 파괴 된 농경지를 비롯한 국토를 개건하고 외부적으로 미국, 일본 등과의 대외 관계 개선을 통해 무역의 확대 혹은 원조를 받아 ‘먹는 문제’를 풀겠다 는 야심찬(?) 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북한은 식량 생산량을 늘이기 위한 초미의 문제는 ‘땅의 지력’을 높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홍수 등 자연재해를 피하고 땅의 지력만 높일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 이다. 실제로 북한은 그들 땅을 80살이 넘는 노인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 서 북한은 최근 전면적으로 도입한 ‘미생물비료 신농법’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농법은 조총련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농사에 도움이 되는 80여종의 미생물만을 특수한 용법으 로 배양하고 화학비료 대신에 땅에 뿌리면 땅의 지력을 높일 뿐 아니라 농업생산량도 급격히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올해 북-미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지난해 12월 미 국무부가 곡물업체 카길사에 50 만t의 곡물을 북한에 수출토록 허용한 것을 미국의 추가적인 대북경제제 재 완화조처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좀더 큰폭의 완화조처를 요구하고 있다 . 또한 제네바 북-미기본합의서를 이행하는 데 핵심과제인 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KEDO)에 의한 경수로건설, 북-미 연락사무소 교환 설치 등을 올 해 북-미관계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내부문제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북한은 미 행정부가 북-미간 금융 거래의 허용, 미 기업의 북한 간접투자와 수출입 허용품목의 확대, 미국 항공기와 화물선의 북한항구 출입허용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북한 지도부가 미국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더구 나 북한은 북-미간 연락사무소 개설도 ‘시간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고 이 소식통은 밝혔다.

또한 북한은 중장기적으로 북-미관계가 정상화돼 평화협정이 체결될 경우 막대한 군사비를 민수부문으로 전용할 수 있어 눈앞에 닥친 경제난을 획 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앞의 소식통은 “북 한의 고위 관료조차도 북-미관계만 개선되면 총알을 팔아 돼지를, 소총을 팔아 쌀을, 탱크를 팔아 방직공장을 만들면 먹고 사는 문제는 금방 풀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주민들의 고통분담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 다. 관계 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군부 위기관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 비로 연간 총예산의 30%에 이르는 약 57억달러를 지출하고 있다.

더구나 북한은 공개를 미루고 있을 뿐 ‘자본주의 시장과의 연대’를 위 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경제개혁, 개방 프로그램을 준비해 왔다는 지적 도 있어 눈길을 끈다.

경제사업을 목적으로 북한의 핵심 경제관료와 지속적으로 접촉해온 인사 들은 황 비서 망명 훨씬 이전부터 북한의 ‘의미 심장한 변화’가 모색돼 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황 비서의 이번 망명으로 오래 전부터 물밑으로 진행돼 온 개혁·개방프로그램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 한다. 더구나 이 개혁·개방안은 북-미관계의 개선과 밀접하게 연동돼 진 행돼 온 것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전향적인 내용들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안다고 이들은 전했다.


예상 뛰어넘는 전향적 개방안 나올 수도

베이징의 일부 소식통은 황 비서의 망명사건으로 이러한 프로그램은 성패 여부를 떠나 더욱 빨리 작동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이 소식통은 “북한의 개방·개혁이 북한 내 강온파의 대립으로 주춤해왔던 만큼 황 비서의 망명을 계기로 김정일과 그 측근들은 개혁·개방쪽을 선택하기 쉬 울 것이다”며 그 이유로 “북한이 어차피 대외관계 속에서 생존을 모색 해야 하고 미국의 대북 개입정책이 가속도가 붙어 북한을 측면지원하고 있는 지금이 강경 보수세력을 설득하는 데 적기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 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실제로 북한은 먹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제기구 혹은 미국에 목을 걸고 있는 상태다. 이 문제는 인도적인 차원이라는 명분이 있는 만큼 미 정부 와 비정부단체( NGO),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도 북한의 요청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북한의 식량 부족량을 고려할 때 턱없이 부족한 양 이기는 하나 세계식량계획은 조만간 식량 10만t을 북쪽에 전달할 예정이 다. 오는 3월 5일에 열리는 4자회담 설명회와 3월7일의 북-미간 준고위급 회담에서 북한의 선택여부에 따라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도 있다.

어쨌든 식량확보와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초미의 관심사인 북한으로서는 어차피 ‘변절’한 황 비서를 되돌려 받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오 히려 이번 사건을 대내외적으로 활용해 ‘실익’을 챙기는 ‘묘수’를 찾 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임을출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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