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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1997년03월06일 제 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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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보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최병국 대검 중앙수사본부장. 예상대로 특혜의 배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깃털’이란 말에 요즘처럼 무게가 실리기도 흔지 않다. 생물학적 이 한 마디는 한보의혹의 ‘몸통’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정 치적 용어로 등장했다. 막상 이 유행어의 진원지인 신한국당 홍인길 의원 은 검찰 조사에서 “평소에도 스스로를 낮춰 `‘나야 터레기 아이가’라 는 말을 자주 했다”면서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 불러일으킨 파장에 당혹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의도야 어찌됐건 그는 한보비리의 본 질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하고도 화려한 수사를 제공한 셈이다.
‘플리 바게닝’ 수사기법 도입했나
지난 1월27일 수사착수 발표로 본격화된 검찰의 ‘깃털 뽑기’가 결코 순 탄한 것은 아니었다. 비밀을 잘 털어놓지 않아 ‘자물쇠입’으로 소문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의 입을 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 총회장은 수서비리 수사과정에서 검사가 계좌추적으로 찾아낸 수표를 증거로 들이밀면 “이놈의 수표에 발이 달렸나. 왜 여기에 와 있지”라며 능청을 떤 일화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그의 딴청 부리기에 화가 난 검사 가 “이러면 재미없다”고 은근히 협박조로 나오자 “어디 한번 때려보시 지”라며 맞받아쳤다고 전해진다. 전에 그를 조사해본 적이 있는 한 검찰 관계자는 “정태수의 입을 열 수 있는 검사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 고 말할 정도다.
그런 검사는 있었다. 홍인길, 황병태, 권노갑, 이철수, 우찬목, 김시형 등 거물급 정치인과 은행장의 이름이 정 총회장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 왔다.
그러나 이 지점이 의문의 출발점이다. `‘한보 돈은 먹어도 소화가 잘 된 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로비 상대를 철저히 보호해온 정 총회장이 그룹 의 재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입을 떼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은 정설에 가깝다. 이 때문에 검찰 주변에서는 `‘플리 바게닝’(Plea Bargaining) 이라는 수사기법이 이번 사건에 도입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범죄 피의자의 혐의 전부나 일부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공범이나 다른 범죄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이 수사기법은, 미국에서 널리 채택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불법으로 간주되고 있다.
검찰이 정 총회장의 비자금 계좌나 은닉 재산을 찾지 못했다는 수사발표 내용이 ‘플리 바게닝’ 의혹을 뒷받침한다. 정 총회장이 이번 수사에서 “재산만 보장해주면 정치인 명단을 불겠다”고 말했다는 뒷이야기도 흘 러나오고 있다. 그의 실질적인 후계자인 3남 정보근 한보그룹 회장이 무 사한 데에도 같은 맥락에서 의심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검찰의 속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뇌물 을 받은 정치인을 구속해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하는 검찰로서는 느긋 하게 계좌를 추적하거나 장부를 뒤지기보다 정 총회장을 어떻게든 구워삶 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 큰 문제는 검찰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면서도 특혜의 배후가 모두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검찰이 정 총회장으로부터 얻어낸 수뢰 정치인 명단을 꼭 거머쥐고 있다 는 의혹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다. 검찰은 홍인길·권노갑 의원에 이어 김덕룡 의원 등 두번째 정치인 명단이 언론에 보도되자 “언급할 가치조 차 없다”며 펄쩍 뛰었다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 “범죄가 되지 않는 사안”이라며 사실상 명단의 존재를 인정하는 쪽으로 말을 바꿨다. 김 의 원 등은 아무런 조건없이 5천만원을 받았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받은 정치자금은 처벌할 수 없는 정치자금법의 허점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 다는 게 검찰의 변명이다.
수사의지의 심각한 결핍
(사진/이번 한보수사에 대해 `PK에 의한 PK를 위한 PK의 수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수사발표문에서는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무 마해달라”는 식으로 구체화했다. 단순한 정치자금이었다는 시비를 막기 위해 돈의 대가성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권 의원의 혐의가 명확해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검찰 이 마음먹고 달려들 때 떡값 5천만원을 뇌물로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 사정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정치자금법의 허점 운운한 검찰의 태도가 실제는 의지의 빈곤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명단은 없다”고 주장하는 검찰의 정직성을 믿더라도 문제는 풀 리지 않는다. 5조원 대출에 32억5천만원의 뇌물이라는 수사 결과는 수사 의지의 심각한 결핍증상으로 진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수사발표를 통해 한보사건의 성격을 철저히 개인 비리로 규정했다 . 구조적인 권력형 비리라는 용어에서 풍기는 ‘몸통의 냄새를 제거하려 는 의도가 느껴진다. 수사발표문의 한 대목을 보자.
“95년 11월 당시 은행쪽에 제시한 총소요자금 4조1천억원 중 9천5백억원 가량을 한보소유 부동산 매각 등으로 자체 조달하겠다는 자구계획이 예정 대로 이행되지 아니하였음에도 한보철강(주)에 자금지원이 계속 이루어진 것은 정태수의 부탁을 받은 홍인길 등의 대출청탁에도 그 원인이 일부 있 는 것으로 추정됨.”
당진제철소 인·허가나 95년 말 이전의 은행대출은 각기 정상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된 것이며 이 과정에 대한 은행감독원이나 감사원의 감독에도 별다른 문제점이 없다는 게 수사발표의 요지다. 검찰은 문제가 된 95년 말 이후의 대출에도 외압의 구실은 `일부에 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쩌다 부도가 나게 됐는지, 정책결정과 관련해 비위를 저지른 관료는 없 는지, 구속된 3명 이외의 은행장들은 외압이나 청탁없이 대출을 결정했는 지…. 국민들은 숱한 의혹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나라의 경제를 뒤흔든 대형 부도사태의 근본 원인이 정상적인 정책판단이었다면 제대로 된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다. 검찰은 왜 국민을 이런 상태로 방치하고 있을까. 국민의 의혹이 그만하다 면 재수사를 해서라도 배후를 밝혀보겠다고 `공익의 대표자답게 나설 용 기가 없는 것일까.
김현철 조사실 풍경 어땠을까
검찰의 수사가 자체적인 논리에 따라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관측은 수사 기간 내내 검찰 주변을 맴돌았다. 수사팀의 진용이 ‘부산-경남 출신’ 인사 위주로 짜인 것을 두고 ‘PK에 의한 PK를 위한 PK의 수사’라는 말 이 나오는가 하면, 정 총회장의 진술내용이 곧바로 청와대에 보고되는 듯 한 낌새가 여러 차례 감지되기도 했다.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에 대한 조 사착수 과정을 두고서는 `‘청와대 교감설’이 설득력있게 제기됐다. 현 철씨를 대하는 검찰의 태도에서 준사법기관으로서의 독립성을 발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검찰 수사가 이대로 끝날 경우 한보특혜의 배후만큼이나 검찰 수사의 배후도 의혹으로 남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훗날 한보사건이 다 시 해부대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검찰은 이를 의식한 듯 비록 고소인 자격으로나마 정색을 하고 현철씨를 소환해 밤을 새가며 조사를 벌였지만 조사실의 풍경이 어땠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전직 대통령을 두명이나 구속해 정의의 수호자로서 주가를 높였던 검찰이 권좌에서 ‘내려앉은 `시체’가 아닌 펄펄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도 칼을 빼들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바야흐로 검찰의 명예와 자존심이 통째로 걸린 마지막 주사위가 던져졌다.
박용현 기자/ 한겨레 사회1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