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1997년02월06일 제 144호 한겨레21

“대통령! 겸손해지십시오”

(사진/신한국당의 의원총회. 등돌린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청와대가 변해야 한다는 소리가 신한국당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김 대통령이 먼저 겸손해져야 한다. 민주화 투쟁 하던 야당 총재시절로 되돌아가서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노동법 사태로 불거진 정국의 위기사태를 맞아 신한국당 의원들이 정국 타개의 첫번째 순서로 한결같이 제시하는 해법이다.

의원들은 현재 위기를 촉발시킨 것은 노동법 날치기 처리가 계기가 됐지 만 노동법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정국위기가 타개될 것이라고 보는 사 람은 적다. 문민정부에 대한 누적된 불만, 즉 민심이반 때문에 생긴 위기 인 만큼 그 대책도 좀더 근원적인 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정운영 스타일에 대한 국민 불만 심각

강경식 의원은 이와 관련해 “이번 정국위기는 노동법 자체라기보다는 이 를 계기로 표출된 문민정부의 국정운영 스타일 등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 때문에 발생했다”며 “따라서 대야 전략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정부 여당이 대국민적인 입장에서 겸허하게 반성하고 자기혁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청와대 출신의 한 초선의원은 “ 민심을 되돌리는 유일한 방법은 첫째로 김 대통령이 겸손해져야 한다”며 “김 대통령이 목에서 힘을 빼는 것이 본인이나 나라나 당을 위한 최선의 길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민들은 영수회담 이후에도 김 대통령의 고압적인 자세가 바뀌었다고 보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서울의 한 다선의원도 “김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면 걸음 걸이가 황제걸음 같다”며 “손짓 몸짓에 옛날보다 더 힘이 들어갔다”고 지적했다. 영수회담에서 다소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국민들이 본질적으로 싫어하는 대통령의 강한 자세나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겸손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현재 정국이 꼬인 원인이 모두 청와 대, 바로 김 대통령에게 귀결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신한 국당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이미 보편화돼 있다. 얼마 전 의원총회나 당무 회의에서 최병렬 의원이 “현재의 위기 정국은 노동법 문제 자체에 있기 보다는 민심이반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나 강경식 의원이 “경제위기는 ‘메이드 인 코리아’이며 정치위기는 ‘메이드 인 신한국 당’”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위의 청와대 출신 의원은 이와 관련해 “모든 문제가 김 대통령으로 연결 돼 있기때문에 신한국당이 잘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지금 당에서 얘기하 고 있는 당론 수렴의 민주화 등 당내 민주화 문제는 부차적이다”고 밝혔 다.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재선의원도 “노동법이나 경제위기, 한보 문제 등 최근의 모든 어려운 상황이 김 대통령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게 사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의원들은 따라서 청와대가 먼저 변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문수 의원 은 지난 1월22일 의원총회에서 “청와대는 문제해결 능력면에서 당보다도 떨어진다”며 청와대에 직격탄을 쏘았다. 그는 이날 저녁 초선의원들의 모임인 ‘한강포럼’ 만찬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청와대가 대통령의 위세를 빌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명령을 당으로 내리고 있다”며 “이는 국력 낭비로 당에 일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구의 ㅇ 의원도 “청와대가 낮은 자세로 먼저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사전달 수준은 유신말기 상황과 비슷

청와대쪽을 향한 언로가 막혀 있다는 이야기다. 지역구 초선인 ㅎ 의원은 “정상적인 하의상달의 길이 완전히 막혀 유신말기 상황과 비슷하다”며 “대통령에게 바른 말을 전하기 위해 언론에 상소문 광고라도 내야 할 형 편”이라고 말했다. 민주계의 한 다선의원도 “대통령이 귀를 열어 시중 의 여론 등을 정확하게 들어야 하는데 청와대 비서관들이 그런 껄끄러운 얘기들을 그대로 전달하겠느냐”며 “우리가 대통령에게 그런 얘기를 전 하고 싶지만 만날 기회를 대통령이 만들어주지 않으니까 방법이 없다”고 실토했다.

윤원중 의원은 언로 확보를 위한 대안으로 “대통령이 김수환 추기경과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등 사회 원로들을 초청해 얘기를 듣는 것도 좋지 만 정치 프로들인 당내 중진이나 다선의원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 들을 만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다선의원들은 민심회복을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제2의 6·29선언과 같은 대국민 항복선언을 제시하고 있다.

김중위 의원은 “영수회담이나 노동법 재개정 등 조금씩 밀려서 내주기보 다는 제2의 6·29선언과 같은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완전히 손을 드는 것 이 오히려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용갑 의원도 22일 의원총회 에서 “노동법 재개정 등을 영수회담에서 할 게 아니라 6·29선언처럼 대 통령 담화 등의 형식을 취해 결단을 내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 장했다. 민주계인 백남치 의원도 “국회가 열려서 노동법을 개정해 봐야 난국처럼 꼬인 정국이 제대로 풀려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회복하기는 힘 들다”며 “국민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6·29선언 같은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아예 당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 중부권의 한 4선의원은 “김 대통령이 차기 후보를 지명하겠다고 연두 기자회견에서 밝혔지만, 지금 시중 여론은 김 대통령이 낙점하면 오히려 선거에서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며 “조금만 있으면 당내에서 김 대통령 에게 ‘당을 위한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탈당해 주십시오’라는 요구가 터져나올 상황”이라고 말했다. 재선의 ㅇ 의원도 “당 인기를 올려 정권 재창출하는 길은 김 대통령이 당무에서 손을 떼고 당이 자율적으로 운영 되도록 2선으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차기 후보의 대표 기용을 주장하는 후보 조기가시화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 정부에서 각료를 지낸 한 다선의원은 “이제 차기 후보가 될 사 람을 당 대표로 내세워 그의 책임 아래 당을 끌고가는 길밖에 없다”며 “그래야 떠난 민심이 돌아오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 다. 민주계의 한 의원도 “대리 관리인 체제로는 신한국당이 국민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며 “누가 됐든 후보를 당의 얼굴로 내세우는 조기가시 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청와대 보좌진의 대폭적인 물갈이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열려야 민심 돌아온다

과거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의원은 “이제 ‘오픈 마인드’를 가진 사람으로 김 대통령 주변의 진용을 짜야 한다”며 “열려 있는 청와 대로 탈바꿈해야 임기말 권력관리를 순조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경제위기 해소책과 관련해서 노동법의 재개정뿐만 아니라 금융실명제 의 보완책도 거론되고 있다.

강용식 의원은 “우선 야당이 대화에 응해 하루빨리 노동법 개정 작업을 마치는 것이 난마처럼 얽힌 정국을 푸는 열쇠가 되지만, 금융실명제를 보 완해서 중산층 이상의 마음을 잡는 것은 경제회생을 위한 조치로 필요하 다”고 말했다. 강경식 의원도 “애당초 금융실명제 보완대책이 절실했다 ”며 “정권의 체면이나 명분에만 집착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실명제 보완 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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