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2월06일 제 144호 한겨레21

“무효! 안기부법!”

‘정보·공작정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가? 정치권과 사회·학술·재야 단체에 밀어닥치고 있는 안기부법의 파고가 높다. 강행을 호언장담하고 있는 정부 여당과 안기부, 이에 저항하는 야권과 종교계, 학계, 재야단체 의 저항이 폭풍전야를 예고하고 있다. 특히 재야단체들은 ‘안기부법 개 악철폐’를 위한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은 노동법에만 매달려 있었다. 지난 총파업 투쟁으로 노동법 개정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도출됐 다. 이제부터는 안기부법의 폐해를 홍보해 나가겠다. 국민들도 나서야 할 때다.” 안기부법이 국민이 심판하는 도마 위에 올랐다.

편집자


(사진/재야단체들은 `안기부법 개악철폐'를 위한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1월7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정치적 결정배경 을 설명했다. “과거 중앙정보부로부터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 중 한 사 람이 나입니다. 5·16군사 쿠데타가 났을 때 나는 바로 중앙정보부에 연 행돼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 박해를 받은 입장에서 법을 개악한다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지난번 북한의 잠수 함이 강원도에 상륙하고 또 연세대에서 한총련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엄 청난 일을 벌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공산당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효 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어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때문에 최근의 안기부법 개정은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과도 다릅니다. 남북이 대치해 간첩이 수없이 내려 오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데드라인이라고 생각해 서 개정했습니다.” ‘날치기 안기부법’이 과거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하 는 것이 아니냐는 한 외신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공산당 무리들이 날뛰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웬 ‘공산당 무리’인가? 지난 93년 취임했을 때는 없던 ‘공산당 무리’들이 김 대통령 자신의 취임기간중에 무더기로 출몰이라 도 했다는 얘기인가. 아직까지도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안기부가 단 두개 조항(제7조, 제10조)이 없어서 출몰하는 ‘공산당 무리’를 색출하 지 못하기라도 했다는 얘기인가. 김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과거 ‘정보· 공작정치’를 자행했던 정보기관에게 칼자루를 다시 쥐어줄 만큼 지난 3 년 동안 상황이 매우 악화됐다는 주장인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창피한 얘기 한토막을 소개한다.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게재한 지난해 1 2월30일자 사설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최근 한국의 악명 높은 안기부에 다시 한번 한국 국민들을 감시하도록 하는 치명적인 새 법을 서둘러 통과 시킴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사설은 또 안기부 법이 북한을 고무·찬양하는 사람들을 수사·체포·심문할 수 있는 권한 을 정보기관에 줬음을 상기시키면서 “남파간첩이 북한을 공공연히 찬양 할 리는 만무하므로 이 법은 정부 비판자들이나 대학생들에게 적용될 가 능성이 높다”는 분석까지 곁들였다. 외국언론이 한국정치를 왈가왈부하 는 일은 분명히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정치를 ‘원시 적’으로 보는 외국언론의 시각에 대해서 분노보다는 창피함이 앞서는 것 은 안기부법의 근원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보면 지나친 평가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시민운동의 불길이 타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월 총파업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시민운동의 공간을 연 운동단체들이 본격적인 안기부법 해부에 나섰기 때문이다.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주도하는 광 범위한 시위도 준비되고 있다. 신한국당 당사와 각 지역에 있는 안기부 지부에 대한 항의방문도 일정이 정해졌다. ‘정치적 타협’으로 후퇴할지 도 모를 야당에 대한 감시와 경고도 병행할 예정이다. 이들의 움직임과 행동 이유를 살펴보자.

박원순 변호사(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사무처장)는 “국가보안법 제7조의 고무·찬양·동조죄에 대한 안기부 수사권의 확대는 모든 국민을 언제라 도 안기부가 수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것”이라며 노동법 못지 않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안기부법의 잠재적인 피해자가 전 국민이라는 얘기다. 고무·찬양·동조 죄가 지난 시대 안기부를 비롯한 수사기관에 의해 남용되어 왔음을 기억 하자는 지적이다. 정치·언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학술·예술 종 사자까지 피해를 입었다는 사례도 지적됐다. 박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사건이 전체 국가보안법 사건의 95% 이상을 점함으로써 이 조 항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해 왔다”고 ‘무효화 투쟁’의 당위 성을 설명했다.


공안사건 휘몰아칠 것인가

학계의 반응도 민감하다. 최근 잇단 대학교수들의 항의성명에는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개정된 안기부법은 안기부의 주도 아 래 사상과 언론에 대한 통제와 처벌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안기부법 개정으로 그동안 잠잠하였던 안기부의 정치공작이 재현되고, 이 에 따라 우리 사회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으로 판단되어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특히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보공작정치 의 폐해가 심화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고무 찬양죄·불고지죄를 안기부에 돌려주는 것은 간첩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 라, 야당과 민주인사를 잡고 민주주의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라고 목소 리를 높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회의 이상수 의원도 안기부법 개정 의 정치적 의도를 경계했다. “지난 93년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 박탈로 안기부는 조직 축소는 물론, 사회 각 부문에 대한 정보수 집권을 상실당하면서 권력구조 내부에서 그 위상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안기부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과거의 위상과 힘을 회복하고자 안기부 의 수사권 확대를 조직의 사활을 걸고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마디로 안기부는 간첩을 잡겠다고 법개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조직의 위상을 복원하기 위해 법개정을 추진했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정부 여당 의 입장에서는 대선국면에서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안기부의 적극적 인 정치개입이 필요했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결국 야당은 안기부법이 재 개정 안 된다면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어떤 형태로든 ‘간첩사건’과 같 은 공안사건이 휘몰아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곽노현 교수(방송대 법학)도 “찬양고무죄는 간첩이 아니라 정치인과 언 론인을 잡기 위한 것”이라며 정치권의 우려에 동의했다. 그는 먼저 진짜 간첩은 공개적으로 북한을 찬양, 고무하며 다니는 짓을 하지 않는다며 법 개정의 출발점이 잘못됐음을 지적했다. 이어 불고지죄 역시 간첩이 잡히 고 난 뒤에 비로소 그동안 누구와 접촉했는지를 캐묻는 과정에서 적용하 는 것이라며 수사권이 간첩을 잡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결국 개정된 법의 적용대상이 지식인, 학생, 언론인, 노동자, 정치인에 집중될 것으로 우려했다. 끊임없는 인권유린과 정치공작 시비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다.

또한 남북통일문제와 관련해서는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공안사범이 양산 될 수도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곽 교수는 “대북통일 관계에 대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좀더 철저하게 안기부의 통제와 감시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는 “그러나 사상과 표현의 자 유는 민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권인 만큼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 며 법개정의 오류를 지적했다.


‘공포정치에 대한’ 공포

이처럼 각계에서 여권이 개정을 시도하고 있는 안기부법을 우려하는 것은 ‘대공수사를 빙자한 정보공작정치’, ‘장기간의 밀실수사를 통한 간첩 조작사건’으로 표현되는 ‘공포정치’에 대한 걱정에서부터 출발한다. 과거 안기부의 망령이다.

이와 관련한 이기욱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한마디는 의 미하는 바가 크다. “안기부법을 날치기 처리하면서 지난 대선 때 초원복 국집에서 유치하게 지역감정이나 부추기던 박일룡 경찰청장을 국내정치를 담당하는 안기부 1차장에 임명한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김용성·신승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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