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한겨레21

파업 깃발 못내린다

(사진/영수회담을 정치전술로 평가한 양대 노총은 분노와 실망 속에서 계속된 파업투쟁을 선언했다. 지난 14일 공동투쟁을 선언한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과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

영수회담은 사상 초유의 전국 총파업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노동계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김영삼 대통령은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국회에서 다시 논의해도 좋다” 고 밝혀 노동법을 둘러싼 논의를 국회로 끌어들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 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이번 파업투쟁을 주도한 노동계가 “계속 투쟁” 을 다짐하고 나서자 파업정국의 앞날을 둘러싸고 이런 의문이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노동계에서는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가 얻은 것은 없다”는 분노 와 실망의 목소리만 높다.

“노동계 선택 여지없는 교묘한 제안”

민주노총은 영수회담 뒤 곧바로 “막연하게 야당이 대안을 제시하면 국회 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민의가 진정 무엇인지, 현 사태의 심각 성도 모르는 독선과 아집을 보여준 것일 뿐”이라고 김대통령의 입장을 평가절하했다.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 위원회(범대위) 박석운 집행위원장도 “최소한 날치기 법안에 대한 원천 무효가 전제되지 않은 채 기존안에서 한두 조항 고치자는 미봉책에 불과 하다”며 “계속적인 투쟁”을 선언했다. 한국노총도 비슷한 태도이다. “국면전환을 위한 고도의 정치적 전술”이라며 “계획된 단계적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단순한 다짐차원이 아니다. 실제 행동에 돌입했다. 민주노총은 “수요파 업을 계속할 것이며, 2월18일로 예정된 4단계 총파업도 예정대로 추진한 다”고 밝히고 조직강화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노총도 민주노총과 연대해 여의도와 부산 광주 등에서 50만 노동자가 참여하는 ‘날치기 노동악법· 안기부법 무효화와 김영삼 정권 규탄 전국노동자 대회’를 1월26일 예정 대로 치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투쟁에 나설 방침이다.

유연한 전술로 연 5백만의 인력을 동원하면서 일약 노동운동을 사회운동 의 중심으로 끌어올렸고, 독선적인 YS로부터 양보를 얻어낸 일부 성과에 도 정작 노동계가 이렇게 분노하는 투쟁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남대 사회학과 임영일 교수는 “영수회담 결과는 노동계로는 받을 수도 , 안 받을 수도 없는 교묘한 제안을 한 것”이라며 “현 상황을 그대로 인정한 것일 뿐 노동계쪽에서 상황을 종결할 만한 변화가 없는 것”이라 고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자본의 양보를 끌어낼 수 있는 유 일한 무기인 파업을 포기할 경우, 투쟁의 주도권을 상실해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의 평가다.

실제 노동계는 총파업의 목표인 노동법 전면 백지화는 얻어내지 못한 채 투쟁을 멈출 경우, 이번 투쟁의 성과를 자칫 정치권에 빼앗길 수도 있다 는 상황판단이 강하다. 투쟁만 하고 성과는 야당이 챙겼던 6·10항쟁의 과오를 반복하는 결론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법에 대한 전면 백지화를 전제로 하지 않은 채 국회로 넘어가 급격한 협상국면이 진행될 때 노동계를 따돌린 채 당리당략과 정치적 계산에 따 라 마무리지어질 가능성도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다.

복수노조 허용은 오히려 민주노총에 짐

한국노총 이정식 정책기획국장은 “YS도 성급했다고 인정한 복수노조 3년 유예를 인정하고 정리해고 요건을 강화하는 등 몇몇 조항만을 고친 채 마 무리할 경우 노동계는 뒷짐지고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 경우 민주노총은 자신의 합법화만을 따낸 채 성과없이 투쟁을 마무리했다 는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양경규 전문노련 위원장도 “정치권 의 당리당략에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야당을 대중투쟁의 주변세력으로 배 치하고 우리가 중심으로 자리잡는 게 중요하다” 고 밝혔다.

결국 단기적으로 노동계는 ‘계속적인 투쟁’을 통해 정치권을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고 실제 그 수순을 밟고 있다. 민주노총은 “3월 1일까지 노동법 재개정 완료”라는 ‘마지노선’을 정하고 이 일정에 맞 춰 “수요파업을 전개하며 상황에 따라 2월18일 4단계 총파업을 앞당길 수도 있다”고 벼르고 있다. 한국노총도 “노사가 배재된 상태에서 여야 의 정치적 흥정으로 진행될 경우 이를 거부하고 3월10일부터 3단계 총파 업에 돌입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압박전술이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을지, 어느 정도 현실화할 수 있을지는 아직 점치기 힘들다. 노동계가 광범한 상승국면을 타던 때와 는 달리 현재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정치권이 본격적인 노동법 협의에 들어가고 대부분의 언론이 ‘대화 와 타협’을 부르짖는 상황에서 얼마나 강경투쟁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 문이다. 또 노동계 내부에서도 노동법 논의를 영수회담을 통해 정치권으 로 넘긴 것 자체가 민주노총 등 노동계의 힘으로 ‘완전 항복’을 받아낼 수 없었다는 역량의 한계도 지적되고 있다. “민주노총의 투쟁동력이 떨 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투쟁국면의 하락은 필연적이었다”는 것이 노동계 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결국 이런 상황을 고려해 단기적으로 노동계의 요구를 정치권에 전달할 수 있는 압박전술을 계속 전개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더 강력한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할 것이다. 실제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모두 투 쟁의 고삐를 놓치 않은 채 정치협상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큰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경우 예상되는 노동계의 단기적인 압박전술은 3월에 있을 임·단투와 노동법재개정 투쟁을 연계하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설을 지난 뒤 2월10일 께부터 본격적인 임·단투에 돌입할 계획이다. 더욱이 산하 개별노조의 임·단투를 산별연맹에서 위임받아 일괄투쟁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압박강 도를 높이겠다는 전략까지 세워놓고 있다. 민주노총도 이 문제에 대해 고 민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기업별 노조 체계인 우리나라 노조의 성격상 섣불리 임·단투와 연계할 경우 기업별 노조의 자사 이기주의와 사쪽의 회유와 설득에 따라 노동법 재심의로의 투쟁역량의 집중이 약화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또 현재 민중운동세력 안에서는 장기적인 전략으로 이른바 ‘전선체 재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 중심의 국민운동본부 건설도 논의

학생, 교사, 농민세력을 아우르는 전국연합과 이번 총파업을 통해 사회운 동의 중심에 떠오른 민주노총을 하나로 묶어 국민운동본부 형태의 전국적 인 연합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87년 6월 항쟁 때 야당과 함께 했던 개헌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와는 달리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등 재야와 시민운동세력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연합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더 욱이 이런 연합체는 이후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 다는 점에서 상당한 동의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합체 결성은 국회 협상과정에서 노동계가 얻는 성과물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더 가속될 것 이라는 게 일부 노동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와 함께 이번 노동법 재심의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든 노동운동의 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논의들이 노동계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투쟁 과정에서 고무된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급격하게 이루어 져 다시 한번 노동조합 결정의 전성기를 맞게 될 것이다. 또 민주노총 등 노동계 내부에서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문제와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 복하고 산별노조로 성장시키는 오랜 숙제를 풀기 위한 노력도 진행될 것 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이번 투쟁에서 한계를 드러낸 한국노 총의 약화와 민주노총의 강화를 점치기도 한다. 지난 1월16, 17일 있은 한국은행을 비롯한 38개 금융노조가 노총산하의 금융노련으로부터 탈퇴한 것이 그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한다.

또 만일 이번 국회의 노동법 재논의 과정에서 노동계의 성과물이 거의 없 는 상태로 끝날 경우 12월 대통령선거에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민주세력 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독자후보를 출마시키는 형태로까지 발전할 수 도 있을 전망이다.

정치권 압박할 협상전략도 시급한 과제

물론 넘어야 할 당장의 산들이 더 높다. 협상국면에서 정리해고제 등 자 본쪽 이해와 맞물린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노동과 자본 양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정치권을 어떻게 압박해 노동계의 이해를 정확히 대변할 수 있느냐 하는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신승근·김창석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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