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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야기/여재성옹 |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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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건너편 뒷골목, 상가건물이 즐비한 사이로 보기에 도 초라한 가건물이 숨어 있다. 이름하여 무형문화재전수회관. 말대로라 면 괜찮은 대접을 받을만도 한데, 겉모습은 푸대접 수준이다. 넉넉함이나 화려함은 고사하고, 건물로서 응당 갖춰야 할 안정감도 모자란다. 올해가 ‘문화유산의 해’라는 세간의 말들이 오히려 쑥스럽다.
건물 속 풍경은 더욱 스산하다. 함남북청민속예술보존회라는 현판이 붙은 사무실은 차라리 썰렁하다. 낡은 사무집기와 차가운 공기. 그 사무실 한 켠에 나이 지긋한 이가 앉아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다. 북청사자놀이 무 형문화재 여재성(79)옹이다. 그는 지금 1년에 한차례씩 있는 북청사자놀 음 수련생 선발을 위해 이력서를 검토하는 중이다.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 웠는지 문간에 신문지로 대충 감싼 단무지며 양파 그릇이 보인다.
“매년 전수 강습회를 열지만 수련생이 계속 줄어들어. 이번에 뽑는 전수 생은 15명인데, 몇이나 건질 수 있을지 걱정이야.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착실하게 배워나갈 젊은이가 아쉽지 뭐.”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인 여옹은 북청사자놀이를 제대로 재연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선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사자 앞에서 하는 뒤채 놀음에 능했지만 나이들면서 기력이 떨어진 뒤로는 주로 북을 들고 흥을 돋우는 일을 하고 있다.
“수련생들에게 해줄 것이라고는 밥과 물뿐이니 선생이라고 어디 큰소리 한번 칠 수 있겠어. 지각해도 야단 한번 못치고 속으로 끙끙 앓고 말지. 이런 옹색한 형편에 전수고 뭐고 다 배부른 이야기일지도 몰라.”
그가 북청사자놀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또 있다. 그는 놀이에 쓰이는 탈을 만드는 데도 일가를 이뤘다. 사자탈을 비롯해 꼭쇠, 양반, 길잡이, 꼽추 등 놀이에 등장하는 이들의 탈은 모두 여옹의 손으로 재현 된다. 최근 고려대 전경욱 교수가 집필하고 한국문화재보존재단과 문화체 육부가 펴낸 <한국의 탈>에는 그의 탈 만드는 법이 그대로 담겨 있다.
“사자놀이에 쓰는 탈은 종이탈이야. 이 탈을 만드는 데는 고서를 한장 한장 붙이는 게 제격이지. 그런데 요즘 고서값이 비싸 엄두를 못내. 사자 는 털도 중요해. 사자털은 1년 동안 비 맞힌 북청 야생삼을 도리깨로 곤 죽이 되게 내려 팬 뒤, 청홍흑적황 등 오색으로 물들여 사용하지. 내가 죽고나면 탈 만드는 법도 맥이 끊어질 것 같아 이번에 책에 담았지.”
그가 만든 사자탈은 지름 80cm에 무게는 15kg 정도 나간다. 진흙으로 틀 을 만들고, 탈을 만든 뒤에는 틀을 부수는 게 관례지만, 여옹은 최근 그 관례를 깼다.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틀에 시멘트를 부어 본을 떠놓은 것 이다.
여옹은 14살 때부터 8촌 형인 여권숙씨에게 퉁소, 북, 징 등 놀이에 들어 가는 악기와 사자 역을 배웠다. 그에 따르면 북청사람들은 매년 정월대보 름이면 동네마다 사자놀이를 했다고 한다. 백수의 왕인 사자가 능히 사악 한 기운을 몰아내고 잡귀를 물리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마 을뿐 아니라 씨족간에도 사자놀이가 성행했고, 경쟁도 치열했다고 한다. “어느 성씨네 사자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 그 집안과 바로 경쟁을 했지. 내 것이 그만 못하면 여지없이 그 사자를 죽여 버렸어. 그러다 일제가 들 어서면서 사자놀이도 수난을 겪어야 했지. 특히 북청사람들의 반항기질이 녹아 있는 장면은 많이 잘리고 말았어.”
여옹은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고생도 많이 했다. 부산에서는 풍로 장사를 하기도 했고, 서울에서는 흑석동에 철공소를 차려 중앙대 함석일 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짬짬이 고향사람들을 수소문해 사자 놀이를 무대에 올렸다. 그는 최근 일본에서 열린 한-중-일 사자대회에 출 전해 북청사자놀이의 힘과 재미를 한껏 선보였다.
여옹은 올해가 문화유산의 해인 만큼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을 전수하고, 이를 외국에 선보이는 데 정부가 많은 지원을 해주기를 바란다. “문화유 산을 보존하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희생만으로 가능하지 않아. 정부가 적 극적으로 나서서 이수자들에 게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해. 그래야만 젊은 이들도 우리의 것을 즐겨 배워나가고, 그러다보면 우리의 문화유산이 세 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게야.”
이상엽/ 자유기고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