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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희망의 사람들 |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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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장애인 고용을 위한 비영리 특수회사 `렘플로이'

(사진/장애인이면 누구든 환영하는 렐플로이에는 장기근속자들이 많이 있다. 전기부품 생산과정에서 일하는 피터 에잇킨은 이곳에서 40여년 동안 일했다.)
장애인을 ‘환영’하는 회사가 있다. 아니 장애인이어야 취직이 되는 회 사가 전세계를 향하여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이루어내고 있다. 인간사회의 벽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심신장애에 대한 편견의 벽을 불굴의 의지로 뛰 어넘고 오히려 비장애인보다 더욱 성공적인 삶을 이룩해가고 있는 터전, 영국의 렘플로이(Remploy)사가 바로 그곳이다.
영국 전역에 96개의 지부·공장을 가지고 1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이 거 대회사는 창립 반세기를 넘어서도 희망과 확신에 찬 걸음을 늦추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일반기업과 다른 점이라고는 바로 납품기한뿐입니다. 비장애인 에게 1주일이 걸리는 일거리라도 우리에게는 그 배가 필요합니다. 주문고 객에게 미리 이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그러나 일단 일을 맡게 되면 틀림없이 정해진 시간 안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부자유는 품질의 적이 아니다
지난 1월10일. 템즈강 남쪽 런던 교외의 브릭스턴에 있는 렘플로이 공장 생산관리부장인 콜린 굿맨(54)은 자신있게 말한다. 컴퓨터로 작업상황을 체크하는 사이에도 쉴새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바쁜 그의 책상 옆에는 휠 체어가 있었다. 휠체어에 옮겨 앉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로 하반신이 심 하게 마비되었지만,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의욕과 투지는 다른 어떤 기업 체의 간부와 다를 바 없었다.
브릭스턴공장은 각종 전자제품에 내장되는 전선을 연결하고 부품을 조립 하는 공장이다. ‘품질보장, 우리 책임’이라는 표어가 벽에 붙어 있고 널찍한 작업장에는 90여명의 기능공들이 저마다 일에 열중하느라 바쁜 모 습이었다. 한쪽에는 완성된 케이블과 제품들이 최종점검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4~5개의 라인에서 서로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디오 내장용 전선, 드라이버를 쓸 필요가 없는 플러그, 독일에서 수주받은 야외용 비 상전화기, 구명조끼 부착 램프 등 다양한 일감에 전념하느라 작업장은 열 기가 가득했다. 또 한편에서는 생산조장이 신참직원에게 일을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장애인들을 고루 고용하고 있습니다. 지체장애는 물론, 정신장애, 학습장애, 시청각 장애 등 모든 장애인을 대상으로 합니 다. 흔히 겉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장애인은 소홀한 대우를 받기 쉽지 요.”
이곳으로 온 지 2년이 되었다는 공장장 테리 하우드먼(48)은 자주 바뀌는 하청내용에 따른 직원교육에 큰 신경을 쓰고 있었다.
“티 타임이요? 오전에 10분이지요. 점심시간은 30분, 오후에는 쉬는 시 간이 없습니다.”
장애인이라 더 많은 휴식시간이 허용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던진 질문에 그는 정색을 하고 답했다.
“주당 37시간 근무에 금요일 오후는 휴무이기 때문에 평일날 더 열심히 일해야지요.”
작업장에서는 저마다 다른 장애를 가진 직원들이 자기에게 적합한 일을 맡아 해내고 있었다. 남보다 훨씬 짧은 팔로 짐수레 운반을 하고 있는 조 세 건세이송(30)에게 일이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온 얼굴 가득한 웃 음으로 먼저 답했다.
“이건 내게 꼭 맞는 일거리에요.”
상이용사 일터로 출발, 7년 만에 거대기업으로
청각장애인으로 40년 근속의 이곳 최고참 노동자인 피터 애트킨(60)은 복 잡한 전선을 조심스레 연결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작업에 몰 두한 이들 모두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장애상태를 잊어버린 듯했다. 장 애 그 자체보다 비장애인들의 선입관이 오히려 이들의 정상적 삶에 더 큰 장애가 되는 듯했다. 바로 하루 전 렘플로이 본사를 찾았을 때 만난 이사 비서실의 비서 버나디테 부인은 성장장애인으로 자기 책상만한 키였지만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활달하게 차를 날라다 주지 않았던가. 이 사람 이 과연 전화로 약속을 한 그 비서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렘플로이에는 물론 비장애인들도 있다. 전체 인력의 10% 정도는 비장애인 으로 주로 바깥 출입이 잦은 영업부문과 꼭 필요한 전문분야에서 일을 맡 고 있다.
“세찬 비바람으로 얼룩진 출근길을 뚫고 간신히 회사에 도착하지만 내 마음속의 날씨는 언제나 빛나는 태양입니다. 오늘도 틀림없이 계획대로 작업을 완수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니까요. 서로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 들며 ‘할 수 있다’라고 아침인사를 할 때마다 힘이 솟아납니다.”
지난해 렘플로이 창설 50돌 기념행사 때 의류생산 라인인 클리터무어 공 장에서 그간의 공로로 왕실의 작위를 받은 관리책임자 그래험 코네트는 이렇게 말했다.
렘플로이는 2차세계대전 직후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어느 곳에서도 일자 리를 얻을 수 없었던 상이용사들에게 일터를 제공하기 위해 비영리 정부 출연기관으로 시작됐다. 이렇게 시작된 렘플로이는 1946년 웨일즈 남부 브리잰드에 바이올린을 만드는 공장을 모태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면서 창립 7년 만에 90여개의 공장을 가동시키는 거대기업으로 자라났다.
애초 렘플로이가 생길 무렵 사람들 사이에는 이 회사를 비즈니스쪽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아니면 사회사업 분야의 한 기관으로 남겨둘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과연 이런 성격의 회사가 일반경쟁시장에서 얼마만 한 경쟁력을 가질 것인지 회의적인 분위기가 전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렘플로이는 이런 의구심을 깨뜨리면서 노동력이 있 는 곳이면 어디든지 공장을 설립해 일반기업과의 경쟁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우수기업으로 발전해왔다.
“최상의 품질을 고객에게, 최고의 일터를 장애인에게”라는 사훈 아래 지난 반세기 동안 렘플로이가 생산해온 제품들은 영국사회의 생활상을 그 대로 반영한다. 전후 일반가정에서 많이 필요했던 부엌용 가구, 의류, 농 기구, 전기·전자제품 등 시대에 따른 다양한 제품들로 렘플로이는 국민 들과 함께 국민 속에서 성장해온 것이다.
산하 5개 계열기업과 거기에 속한 총 96개의 공장은 문화상품, 가구, 의 료기기, 전자제품, 포장업, 의류제조업 등의 생산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국회도서관을 비롯한 대학과 초등학교 납품용 도서제본에서 각종 오디오 제품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이들의 주요 고객 중에는 음반전문업체 EMI와 인기의류업체인 로라애슬리도 포함돼 있다. 가구업은 렘플로이의 주목표 생산부문으로 침대, 옷장 등 가정용 가구에서 도서관, 사무실용 집기, 호 텔과 상점의 진열대에 쓰이는 최고급 전시용 가구까지 총망라한다. 본사 전시실에 비치돼 있는 각종 가구는 영국공산품 공인마크를 획득한 제품답 게 놀라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고급가구들이었다.
세자책봉식 납품 의자는 고급 소장품
좀 오래 되었지만 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된 자랑거리가 있다. 웨일 즈성에서 거행된 찰스 황세자의 세자책봉식 때 사용된 1천여개의 의자를 이곳에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의자 모델은 지금도 일반인 사이에서 고급 소장품으로 인기가 높다.
휠체어와 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구 등의 의료기기 제작으로부터 일반시장 에서 눈길을 끄는 레저용 의류와 속옷, 군납용 의류와 각종 특수의류도 렘플로이의 주요 생산품이다. 이들 제품은 해외에도 많이 알려져 주문이 쇄도하고 있을 정도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때 경호원들이 착용한 특수복도 렘플로이가 자체 개발한 작품. 그 이후 미국 국방부도 고객이 되어 군복류 수출의 길을 텄다.
정부지원으로 설립되었지만 비영리 특수회사인 렘플로이는 이윤 전부를 고용재창출로 연결시키고 있다. 해마다 정부로부터 약 9천4백만파운드를 지원받고 있으며 지난 95년에는 1억3천4백만파운드(약 1천9백억원)의 매 출을 이룩해 50년 역사상 최고의 해를 기록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금만 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게 이들의 태도이다. 더구나 지난 대처 정 부 당시 지원금이 동결되면서 더욱 험난한 경쟁운영체제로 등을 떠밀려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렘플로이가 가장 신경쓰고 있는 부문은 뭐니뭐니 해도 장애인의 교육과 훈련이다. 국가공인기능자격증(NVQS) 획득을 목표로 장애인들을 훈련시키고 있고, 또한 본사직할 ‘직업연수원’을 마련해 계열기업별로 실시하는 훈련프로그램을 전폭 지원해주고 있다. 작업장 기술에서부터 경 영, 관리기술뿐만 아니라 지도력 개발, 건강과 안전교육, 변화적응과 스 트레스 관리 등 내면적인 기술까지 세밀하게 가르친다. 이런 높은 수준 덕분에 ‘직업연수원’은 지금까지 네번이나 전국 기능훈련상을 받은 바 있다. 결국 장애인들에게 자립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최고의 길은 능력개 발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 렘플로이가 내놓은 고급인력 양성계획에 대한 회사쪽의 설명은 다음 과 같다. “우리의 꿈은 더 많은 이들을 일반기업체에 고용시키는 것입니 다.”
단순히 렘플로이가 고용하는 장애인력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렘플로이 의 인력을 일반기업으로 진출시켜 장애인 인력을 일반인력으로 전용하자 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장애인들이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일반기업의 편견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더 많은 장애인력의 고용을 유도하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 을 불식할 수 있는 첩경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까지 렘플로이를 거 쳐 전국 체인인 ‘막스 앤드 스펜서’ ‘테스코’, 각급 시중은행과 금융 기관 등에 고용된 인원은 1천6백명 정도다. 렘플로이는 앞으로 5년 안에 이 숫자를 5천명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영국의 장애인은 성인만 6백만명이다. 이들 중 7%만이 사회공동시설 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자기 주택에서 살면서 지역 공동체와 사회복지기관의 도움을 받고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해당 지 역의 장애인 현황을 파악해 그들의 복지와 생활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각 자원봉사단체의 구실도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 장애인의 복지부문 에서 렘플로이가 물론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지만 이런 방법이 전부는 아 니라고 장애인 복지의 세계적 전문가인 런던정경대학(LSE) 사회정책학과 샐리 세인즈베리(52) 교수는 밝힌다.
“장애인 복지정책을 획일적으로 다루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자체기 업 운영, 일반기업의 평등고용, 중증장애인의 수용기관 보호, 지역사회 내 보호 등 탄력성 있는 다양한 접근방식이 필수적이죠.”
교육·훈련 지원… 장애인 고용 길잡이
한 가지 이론에만 의존해서 일률적으로 장애인 정책을 펴나갈 경우 많은 부작용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최근 유행하는 장애인의 지역사 회 내 복귀 프로그램인 ‘일반화 정책’이 때로는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접근일 수도 있다고 영국의 많은 장애인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웨일즈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해 40년을 봉직하고 지난해에 정년퇴직한 렘 플로이 역사의 산 증인인 스탄 페트릭(72)은 이 회사와 함께 한 반평생이 “일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장애인이 바 라는 행복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 는, 작지만 안정된 터전이 있고 쉬는 시간 함께 차를 나누며 전날의 축구 시합을 얘기할 동료가 있으면 살맛 나는 인생이 아니냐고 패트릭은 반문 한다. 렘플로이는 그런 작은 행복을 이 ‘보통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21세기를 준비하는 희망의 공동체임이 분명해보였다.
런던=권은정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