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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문인들의 민심기행 |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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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시인
80년 5월의 광주를 상징하는 금남로. 나는 그 거리를 두고 ‘나는 이곳에 서/ 이제 영웅들의 광기를 찾지 않으련다/ 그리고 다시 빵에 피가 묻는 것도 원치 않으련다’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더이상 폭력과 희생이 반복 돼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소망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그 거리 에 서서 “5�18 민주화 투쟁의 연속선상에 서 있다”고 천명한 바 있는 김영삼 정권의 위상을 시민들에게, 나에게 되묻는 마음은 착잡하다.
당시 “우리가 싸우다 죽으나 도망가다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눈물겨운 논리의 유인물이 뿌려졌던 금남로.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자기의 의사표명을 하려 들지 않았다. 뭔가 조금은 멈칫거리고, 주저하는 태도들이었다. 5�18 이후 맛본 쓰라린 정보정치의 기억 때문일까. YS에 대한 비판이 곧 DJ 때문으로 비쳐져서일까.
“쌀개방도 속았는데 어떻게 믿나”
문민정부 초기 김영삼 정권의 개혁정책이 힘차게 전개되자 광주시민들도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정부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심지이 90% 이상의 광주 시민이 지지를 표명했다. 이는 부산은 물론이고 서울, 대구, 대전 등의 대도시 지지율을 능가한 것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나 역시 초창기 김대 통령의 그러한 논리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금융실명제 등 잇따른 개혁조 처들을 마음 속으로 지지했고, 전직 두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구속되자 이 런 여론들에도 수긍했다. “만약 DJ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걸? YS니까 그렇게 밀어붙이지.” 대부분의 광주시민들도 같은 생 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솔직히 “아니올씨다”다. 특별히 누구랄 것 없이 “그래 도 민주화투쟁했다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나 “자기 상황에 유리하다 고 판단되면 언제든 변신할 사람”이라는 시중의 말들에 별다른 이의없이 동의하는 편이다. 금남로 3가에 위치한 모 생명보험회사 차장 이아무개(3 9)씨의 말은 그래서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는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 범할 때 민주발전에 대한 기대와 지지로 일종의 존경심까지 가지고 있었 다고 토로한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3당합당 때부터 소신과 줏대가 없 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국가경쟁력강화 차원에서 개정했다 는 노동법에 대한 후속조처들이 하나마나한 소리로 들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조금만 지나면 노동자들 마구잡이로 잘라버리지 않을지 누가 압 니까. 쌀개방 안 한다고 철썩같이 말하고 진짜 지켰습니까?”
지난 1월18일 금남로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아들의 약국에 나와 소일하고 있다는 한 할머니는 대뜸 “되는 일이 없다 ”고 말문을 연다. “약국들조차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시국이 왔다갔다해 장사가 안 되는 것 같다”는 진단이다.
찬반이 엇갈리기도 한다. 전직 은행원이었다는 김경식(61)씨는 “민주적 절차를무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난국을 헤쳐가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 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기업인들은 당연히 개정 노동법을 찬 성한다. 가톨릭센터 뒤쪽의 한 호프집에서 만난 4명의 중소기업인들은 정 리해고제, 변형시간근로제, 퇴직금 중간정산제 등이 국가경제적 측면에서 시의적절한 조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악의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지금 대학교수들을 비롯 사회각계각층과 야당에서 노동법 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안기부법 반대만은 똑같은 생각이다. 파업 에 나선 노동자나 사장님이나 한결같다. 이게 항쟁을 치른 광주의 특수성 인지 모른다. 혹은 그것이 대선에 끼칠 악영향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중소기업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이제 전쟁위협도 그만큼 줄어들었는데… 설사 안보문제라 할지라도 안기부가 인지한 사실을 관련 수사기관에 알려주면 될 것을 뭣땜시 과거로 회귀하는 안기부법까지 만들 어야 하나요?”왜 정부가 안기부법을 개정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시민들 은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처럼 마구잡이로 끌어다가 조 질려고….” “또다시 무법천지로 맹글려는 것 아닙니까?”
‘권영길 위원장’추대론도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의 하나는 이번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기습적 국회통과에 대한 항의와 저항 자체보다는 이제 더이상 김 정권의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금남로에서 만난 대다수 시민들이 “적어 도 문민정부가 그럴 수가 있느냐” “군사독재시절보다 더한 것 같다”고 들려주는 말 속엔 그나마 김정권에 걸었던 실낱 같은 기대마저 버렸다는 느낌이다. ‘호랑이굴로 들어가 호랑이에 사로잡힌’꼴이 아니면 ‘독재 와 싸우며 어느새 독재권력을 닮아버린’ 또다른 형태의 ‘호랑이’에 대 한 불신과 냉소가 생각보다 훨씬 깊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일각에선 권영길 민주노총 의장을 “제2의 바웬사로 만들어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그냥 흘려보낼 수만은 없는, 의미심장한 얘 기가 들리기도 한다. 그동안 지역차별정책과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지역인 호남인들로선 “더이상 구시대 여·야를 막론한 구시대 정치인들에게 끌 려다닐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차기에도 DJ가 정권을 못잡을 경우 호 남 사람들에겐 바라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구책적 대안의 성격이 들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분명 한 특정 정치인들에게 전폭적 지지를 보내왔고 일말의 지역감정에 휩쓸려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담겨 있던 민주세상과 민족적 화합, 개혁에 대한 열망이 그런 식 으로 표출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광주 시민들의 정치적 태도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이 번 날치기처리나 총파업 시위를 통해 YS에 대한 혐오를 더욱 확실히 확인 하는 분위기다.
사진 김혜선/ 프리랜서
임동확/시인
59년 광주에서 남.
전남대 국문과 졸업.
시집 `매장시편' `운주사 가는 길' 등 다수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