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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문인들의 민심기행 |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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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문학평론가
나는 고향이 대전이고 대전고등학교를 1학년까지 다녔지만, 80년 이래로 대전 출신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대구나 광주와 전주에서 그러하 듯이, 대전에서는 대전고등학교가 경기고등학교보다 더 좋은 학교인 데다 가 졸업생들이 지역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니, 솔직 히 말해서 굳이 감추려 해왔다. 왜냐면, 일찍이 가족 전체가 서울로 떠난 뒤에 연고가 완전히 끊긴 데다가, 박준병과 JP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겨 우 술자리에서 어쩌다가 <대전블루스>를 부르는 정도였고 그것마저도 노 래방이 생긴 뒤로는 거의 부르지 않았다.
“이런 날치기는 보다보다 처음 본다”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면서 나는 인기그룹 주주클럽의 노래 <16/20>을 되풀이해서 들었다. 후렴구 “아이 야 야야 쇼킹 쇼킹 아이 야 야야 쇼킹 ”을 입 안에서 따라 부르면서 23년 만의 귀향이 가져다 줄지 모르는 어 떠한 충격적인 사태에도 ‘쿨’하게 대처하리라고 굳게 맘을 다졌다. 그 래서인지 충남대가 내가 살던 문화동에서 궁동으로 이사했다는 것에 대해 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낯선 도시를 몸으로 알려면 유흥가를 먼저 둘러보아야 한다는 격언에 따 라서 금요일 밤 나는 관광특구인 유성구의 봉명동과 궁동을 돌아봤다. 봉 명동은 유성온천을 중심으로 해서 호텔과 여관, 단란주점과 나이트클럽 등이 모여 있는 곳이고, 충남대 후문에서 이어지는 궁동 유흥가는 신세대 들이 노는 곳이다.
유성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 아저씨는 “도망치면서 망치질하는 건 봤지만 이런 날치기는 보다보다 처음 본다”면서 흥분했다. 이어서 대통 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구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의 학삐리 적인 노파심이 발동했다. 이런 민심기행에서, 필자의 주관적인 선입견에 빠져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함정이 아닌가. 최선의 민심기 행이 최악의 여론조사보다 뒤지게 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니까 말이다. 이런 노파심에도, 내가 만나 본 예닐곱명의 택시운전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노동법의 날치기 통과를 비난하면서 욕을 해댔다. 그리고 한결같이 대전 지역의 경기침체라든가 물가상승을 들먹였다. 어떤 분은 전두환 때가 살 기는 더 나았다고 했다.
유흥가인 봉명동과 궁동은 썰렁한 편이었다. 대전 상점들의 특징 중의 하 나는 간판이 크다는 것인데, 이 점은 술집이든 노래방이든 옷가게든 마찬 가지다. 그런 큰 간판에 비해서 봉명동 나이트클럽 안은 한산했다. 출입 구 앞 어깨들의 시선을 견디면서 유명한 나이트클럽 다섯 군데를 들러봤 지만 모두 손님이 없어 썰렁한 편이었다. 궁동의 한 술집 주인은 “파업 을 그만했으면 좋겠다. 방학이라 학생 손님이 적은 데 파업까지 하니 영 매상이 안 오른다. 파업 때문에 사람들이 집으로 일찍 돌아간다”며 불평 을 늘어놓았다.
18일 토요일 오전에는 대덕연구단지 안의 한 연구소와 민주노총 전문노련 산하의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사무실을 찾았다. 연구소의 박사 연구원은 “연구 용역을 주는 외부 기업에서 ‘박사가 왜 조합원이냐’면서 용역을 철회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 과기노조의 소식지에 따르면, 원자 력안전기술원에서는 원장 스스로가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전 지부장이었던 장순식 박사에게서 과책자격을 박탈한 부당노동행위도 있다는 것이다.
과기노조에서 만난 연구원들은 이번 노동법 개정 사태 이전부터 대덕단지 는 이미 전체의 분위기가 희망이 없는 곳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이미 한국원자력연구소의 경우 한전으로 사업을 이관하면서 정리해고, 대체근 로를 자행했다고 한다. 원자력지부의 조합원 숫자는 1천1백30명 가량에서 6백80명 가량으로 줄었고, 해고자도 7명이나 생겨났다고 한다. 연구를 단 기적인 비즈니스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모든 연구원은 한해 벌어 한해 먹고 사는 처지로 전락했고, 민영화다 통폐합이다 해서 연구환경이 아주 열악해진 바람에 잠재적 이직 희망률이 60%가 넘는다고 한다. 한 연구원 은 “어설픈 국제경쟁력 강화논리야말로 연구의 국제경쟁력을 원천적으로 깎아내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전역 광장, 불타오른 상여
토요일 오후에는 대전역에서 전날 결성된 대전충남범국민대책위원회가 주 도하는 집회가 있었다. 이미 대전에서는 10여 차례의 집회가 열렸다고 한 다. 지난 15일에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수천명이 모인 집회가 있었다는 것 . 그런데 여기서는 집회가 끝난 뒤 평화적인 시가행진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대전역에서 6백∼7백m 떨어진 데에서부터 경찰이 최루탄을 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지점은 신한국 당사가 있는 곳이다.
본 집회는 각종 노조의 깃발, 플래카드가 연단 앞으로 모이면서 시작되었 다. 연사로 올라선 한 해직 교사는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까지는 개악 된 노동법을 무효화시킬 것을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1천여명 정도 모인 이날 집회의 모든 구호 뒤에는 김영삼 정권 퇴진을 다시 복창하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이 구호가 나와도 집회장 주변의 사복경찰들의 얼굴빛이 변 하지는 않았다. 이어폰을 낀 경찰에게 다가가 “이제 앞으로 수요일만 집 회를 한다니까 좀 편하게 된 거 아닙니까?”라고 말을 붙이자 “계속된다 는 건데 우리는 더 피곤해요. 어차피 매일 보고서 써 올려야 하고…”라 며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4시 반경에 끝난 이날 집회는 가두행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경찰쪽에서 ‘근조 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상여와 대통령의 허수아비를 문제삼 아 신고되지 않은 사항이라며 가두행진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 국 6시가 다 돼 집회는 끝났다. 허수아비를 전경들에게 빼앗긴 집회 참가 자들이 대신 상여에 불을 붙였다. 사오분 가량 연기와 재가 대전역 광장 의 하늘로 날아올랐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날치기 무효 총파업 투쟁은 아직 시민들의 일상 문화현실과 전반적으로 결합하지는 못하고 있다. 토요일 저녁 신한국당사 건너편의 동양백화점은 올해 첫 바겐세일의 마지막날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북적댔다. 서울 명동 과 유사하게 패션 가게들이 밀집한 은행동의 차 없는 거리에는 10대와 20 대의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길거리의 리어카에서 인 기그룹 ‘영턱스’와 ‘H.O.T’의 스마일 배지 달린 목도리와 헤드 마스 크를 팔고 있었다는 것. 또 대전역 대합실에서는 사람들이 TV 앞에 모여 드라마 <첫사랑>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의 3주기 되는 날 대 전의 밤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사진 유창하 기자/ 한겨레 사진부
이재현/문학평론가
58년 대전에서 남.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 졸업.
말지 편집위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