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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문인들의 민심기행 |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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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식/ 시인
잊혀질 듯하면 찾아가서 타향의 객(客)처럼 용무만 마치면 돌아오곤 하던 부산이다. 고향이라 하나 떠난 지 열다섯 해가 넘고 보면 부산에서 보낸 어린시절과 젊은 날의 고민과 방황은 이제 그저 가슴 속에 묻혀 있는 아 련한 추억일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니 정확히 하자면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때부터, 더불어 부산이 ‘대통령의 도시’(혹은 왕도)가 된 때부터 나의 마음 속에는 어떤 석연찮은 불편함이 생겨났던 것도 사실 이다. 부산은. 그렇다. 부산은 이미 내 기억 속의 고향이 아니었다. 역사 를 짓누르는 어둠이 우리 모두를 호명하던, 80년대의 그 까마득한 추락과 상처의 기억들을 그곳에서 더듬는 일은 낯선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루아 침에 부자가 되어버린 친구를 대하는 것이 두려워 마주치기를 애써 피하 려는 사람의 심사를 지니고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언제나 그늘이 앞서 곤 했었다.
나의 고향이 부자가 된 친구처럼…
그러나 착각이었을까. 그날 내가 맞닥뜨린 부산의 모습은 처음부터 나를 당황하게 했다. 부산역을 나서는 나의 눈 앞에는 서울의 명동과 종로와 여의도에서 목격할 수 있는 운집된 군중이 있었다. 나는 마치 신기루를 보듯 그들의 머리 위로 1월의 찬바람에 휘날리는 무수한 깃발이 보였고, 또 환청인 듯 고음의 선창에 따라 터져나오는 노여운 함성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집회를 마친 사람들은 시위대열로 바뀌며 움직이기 시작했 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부산역에서 범일동을 거쳐 서면로터리 까지, 먼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쉬지 않고 울려대는 풍물소리와, 서서히 쉬어가는 목청의 구호와, 꼿꼿이 곧추선 채 펄럭이는 깃발의 대열, 그 한 복판에 있었다. 도대체 얼마만의 일일까. 태어나서 자란 부산의 긴 외길 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보는 것이.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그리고 걸으면서 나는 보았다. ‘오만! 김영삼 ’ ‘똥물! 낙동강’이라 쓴 깃발의 구호들을. 부산진역 근처를 지나면서 는 건너편 부산일보사 건물에 내려진 긴 현수막도 보았다. “날치기 통과 노동악법 즉각 철회하라”는 구호가 적힌. 나의 마음 속 질문은 하나였다 . 이곳 부산에 머물다 간 시간들 속에 무엇이 있어 이 도시의 풍경들을 다시금 변하게 한 것일까.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을 ‘부산노동자회’ 선전부장이라 했다. 그는 기꺼이 이야기에 응했다. “얼마나 모인 것 같 아요?” “칠천명 정도는 되는 것 같은 데예.” “과거 87년 6월항쟁과 비교한다면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87년이 단위노조 중심의 산발적 파업이었다면 지금은 총파업분위기고 파업과 더불어 가두시위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 다릅니더. 하지만 6월항쟁 때처럼 시민들이 대열에 적극 참여하는 양상은 아직 아니지예.”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이 결코 적 대적인 것은 아니라 했다. ‘부산여성회’가 퇴근길의 지하철 승객 8백59 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그중 75%가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지지했 다고 한다. 총파업을 돕자는 모금에는 하루 평균 2백~3백만원이 걷힌다는 말도 덧붙여. 지금까지 부산이 김영삼 정권의 아성이었던 점에 비추어 이 러한 반응은 엄청난 것이 아니냐는 것이 그의 얘기였다.
그 외에도 그를 통해 들은 것이 많다. 대통령선거에서는 절대적 지지로, 또 김영삼정권의 초기 개혁작업에 대해서는 전폭적 찬성으로 나타났던 부 산의 여론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위천공단’문제 였다. “부산은 우찌해도 지를 찍으니까 대구 사람들 표 얻을라꼬 위천공 단 맨들어서 우리한테 똥물 맥일라는 거 아임니꺼.” 이것이 김영삼 정권 에 불만을 가지게 된 부산 사람들의 공통된 정서였다. 나중에 만난 한 젊 은 택시기사의 얘기는 이것을 더욱 실감케 했다. “술자리에 가면예, 우 리 마 손가락 끊어뿌자는 말이 많이 나왔심미더. 나중에는 낙동강에 손가 락이 둥둥 떠내려간다는 말도 나왔고예. 모두 김영삼이 찍은 것 후회한다 는 말이지예. 그란다고 나중에 부산 사람들 김영삼이 안 찍을 거가 카문 그건 잘 모르지예.” ‘위천공단’문제에 대해서는 부산 시민들 전체의 민심이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번 파업의 경우는 어떨까. 파업시위를 이끄는 사람들의 자신 감이 다른 어느 때보다 높아도 오늘의 상황이 ‘범국민적 항쟁’으로 이 어질 수 있을지를 장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위천공단문제로 시작 된 부산 시민들의 불만이 이번 일로 더 높아졌어도 아직 시민들의 마음은 유보적이라는 편이 옳을 거라예. 노동법 개정안 자체보다는 날치기 통과 라는 문제에 불만을 갖고 있는 거 아니겠심니꺼.”
차도의 군중과 인도 시민의 거리는…
어쨌든, 그날의 파업시위는 끝났다. 나는 이미 어두워진 서면거리를 여기 저기 쏘다녔다. 중고등학교의 까까머리 시절 방과 후의 방황의 거리. 이 제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 ‘차도’의 군중과, 그것을 지켜보았을 ‘인도 ’의 시민 사이의 거리를 느끼고 싶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도시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생선냄새 질펀한 자갈치시장에서 쏟아지는 일 상의 언어와, 지식인의 언어와, 분노한 군중의 언어와 만나 ‘달라진’부 산을 느끼고 싶었다.
“위천공단이니 노동법이니 하기 이전에 이 지역경제가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제. 나라경제 죽고 부산만 살아서도 안 되 지만 김영삼이 대통령 되면 뭔가 경기가 활성화될 거라고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불만이 쌓여온 거 아니겠나.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은 지금처럼 어려운 적은 없었다칸다.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 분명히 있다 .” 몇년 전부터 자동차 영업소를 운영해 오던 친구의 말이었다. “아니, 이란다고 뭐시 어떻게 되노, 너거들 떠든다고 이미 통과된 법이 다시 바 뀔 수 있겠나. 그라고 김영삼 대통령이 뭐 그리 못 했노. 아시안 게임 여 기 유치해서 그래도 부산 발전이 십년은 앞당겨지는 거 아이가.” 나이가 지긋한 식당주인은 가당찮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학교에는 어떤 말이 써붙어 있는 줄 압니꺼. ‘멸치 팔아 키운 자식 날치기범되어 돌아 왔네.’ 지금은 방학이지만 개학하면 시끄럽지 않겠심미꺼.” 이것은 찻 집에서 만난 대학생의 얘기다. “장사가 이전맨쿠로 안 된다는 거말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리요. 정치같은 거는 관심도 없고.” 이것은 자갈치 시장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속 마음을 섣불리 드러내지 않는 부산 사람들답게. 그러나 어떤 이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 지금의 ‘반(反)김영삼’ 정서는 회복되기 힘들 거라고, ‘퇴진’을 말 하기는 저어하지만 과거와 같은 전폭적 지지는 결코 없을 거라고. 그렇다 면 오늘 부산의 변화된 민심이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방파제에 갇혀 출렁이는 물처럼 정서의 이켠과 저켠을 오가는 마음의 물결은 내일 다시 잠잠해질 것인가, 아니면 솟구쳐 자신들을 가두어 놓은 둑을 넘을 것인가.
나는 지금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다. 아니 아직은 어떤 결론도 내리고 싶지 않다. “영삼이가 부산을 위해 해준 게 뭐 있노”하는 불만과 “그 래도 이 사람들 선거가 닥치면 다 몰표를 줄 거 아닌지” 하는 우려 사이 에는 분명 ‘불만은 있는데 대안이 잘 보이지 않는’ 오늘의 현실이 있다 . 누군가의 지적처럼 지금 부산의 민심 속에는 적어도 ‘편중된 권력이 편중된 행복을 줄 것’이라는 오도된 기대의 거품은 걷히고 있지만, 오늘 이 1997년이 던지는 위기의 동시성 속에서 스스로를 열어 내일의 대안을 찾아갈 공동체적 사유의 힘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 러나 나는 이것 한 가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를 관통하는 역사 의 시간은 우리의 정신을 지탱해갈 이성의 넓이와 깊이를 조금씩 채워가 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찾은 부산에서 나는 잃어버린 시간의 의미를 발 견할 수 있었다.
문부식/시인
59년 부산에서 남.
고신대 신학과 중퇴.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구속.
시집으로 `꽃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