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한겨레21

노동악법, OECD 도마 올랐다

(사진/파리의 OECD 관계자들은 이번 회의가 한국 정부의 `노동탄압'에 대한 비판의 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고 있다. 회의장면.)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따른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게 됐다. 신고식 장소는 1월22일 파리, OECD 고용노동사회문제위원회(ELSA) 회의장이다.


한국정부 해명 먹혀들까

한국의 개정노동법 문제를 주의제로 다룰 이번 ELSA(의장 그로센·스위스 ) 회의는 지난 1월10일 OECD 도널드 존스턴 사무총장이 구본영 OECD대사 를 만나 한국의 개정노동법과 노동탄압에 대한 우려를 전한 뒤 발표된 것 이다. OECD는 또 ELSA 회의 전날 개발기구의 양대 자문기구인 노동조합자 문위원회(TUAC)와 기업산업자문위원회(BIAC)에서 한국 노동자 대표와 사 용자 대표의 설명을 듣기로 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윤영모 국제부장) 과 한국노총(노진귀 금속노련 정책실장) 등 노동조합 대표를 비롯해, 기 업쪽 대표(경총 김영배 상무이사·이동응 국제부장), 정부 대표(박길상 노동부 노정국장)가 지난 1월19~20일 ‘조직의 목소리’를 가지고 파리로 향했다.

이번 ELSA 회의는 한국 정부가 지난해 10월 OECD 가입 이후 최초로 참석 하는 OECD 분야별 위원회 회의다. 말하자면 신고식인 셈이다. 하지만 국 내 총파업 정국에 대한 최초의 국제기구 ‘판결’이기도 한 이번 회의는 한국 정부에 ‘가혹한 신고식’이 될 전망이다.

무엇보다도 OECD에서 회원국 노동법의 ‘국제기준 미흡 여부’를 주제로 회의를 연 전례가 없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최근 ELSA 회의의 주된 의제는 실업문제 대책이었다. 이번 ELSA 회의가 비정기 회의인데도 대다수 회원국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도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일 반적으로 ELSA 회의는 의장국, 부의장국, 사무국 국장, 교육담당 국장들 과 관심있는 몇개 나라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번 회의는 OECD 회원국들이 대부분 참가할 예정이다. 그만큼 한국의 개정노동법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LSA의 정기회의는 오는 3월에 열릴 예정이다.

물론 한국 정부는 이번 ELSA 회의에서 개정노동법에 대한 ‘해명’작업을 벌인다. 외무부에 따르면, 정부 대표단은 ELSA 회의에서 “개정노동법이 국제노동기구(ILO)와 OECD의 권고를 충분히 감안한 것”임을 설명할 예정 이다. 대표단은 또 복수노조 금지에 대해 “유예기간이 있지만 복수노조 를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런 조처는 남북 분단 상태와 현 경제여 건을 고려한 한국적 특수성임을 강조할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설명에 대해 정부 스스로도 설득력이 없을 것으로 평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특히 복수노조 금지 문제와 교원·공무원 단결권 불인정 문제에 대해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고 ELSA 회의를 전망했다. 외무부의 한 관계자도 “사실 국제사회에서 복 수노조를 허용하지 않은 나라가 몇 나라 안 된다”면서 “OECD 국가에서 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 국가들도 대다수 인정하는 문제”라며 한국 정부의 해명이 먹혀들지 않을 것임을 우려했다.

또 여권의 한 관계자는 “최근 미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이번 ELSA 회 의에서 한국에 노동법 재개정을 공식 요구하겠다’고 알려왔다”면서 1월 22일 회의에서 ‘재개정’의 목소리가 높을 것으로 진단했다.

프랑스 현지 분위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파리의 OECD 관계자들은 이번 회의가 한국 정부의 ‘노동탄압’에 대한 비판의 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고 있다. 이미 여러 회원국들이 한국의 개정노동법에 불만 과 우려를 드러낸 상태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합법적’으로 참석

OECD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국이 지난해 OECD 가입 때 약속한 ‘ 노동법의 국제적 기준’은 바로 ILO 기준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IL O 협약은 완전한 결사자유(제82조)와 단체교섭권(제98조)을 규정하고 있 으나 한국의 새 노동법은 이런 취지를 제대로 못 살리고 있다”고 개정노 동법을 평가했다.

또 프랑스 언론들은 “지난 1월9일 OECD 집행위원회에서 노르웨이와 기타 북유럽 국가들이 한국 개정노동법 문제를 거론했다”고 전하고 있다. 프 랑스 언론은 “이들 국가의 한국 노동법 거론은 한국 정부에 노동법을 국 제적 수준에 맞출 것을 요구하는 명백한 정치적 압력의 성격을 띠고 있다 ”는 설명을 덧붙였다.

OECD 국가의 이런 태도는 ‘노동기본권 보장은 인권의 기초’라는 이들 국가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민당이 오랜 기간 정권을 잡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대다수 OECD 국가들은 노조를 주요한 정치 파트 너로 인식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노동조합과 손잡은 노동당이 정권 을 잡는 경우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더욱이 OECD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함께 인권을 3대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노동권 을 기본적 인권의 하나로 인식하는 것은 물론이다.

OECD가 지난 1월 초 한국 정부에 ‘OECD 가입서한’을 공개하는 문제를 요청한 것도 회원국들의 이런 비판의식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노동관계법을 OECD 가입에 맞춰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정해 정기국회에 제출할 방침”임을 설명한 이 서한은 한국 정부의 반대에 부 딪혀 공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몇 논평가들은 이번 회의에서 민주노총이 참가하는 것을 한국 정부의 모순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고 있다. 민주노총은 1월21일 OECD 양대 자문기구의 하나인 노동조합자문위원회(TUAC)에 참석 해 ‘노동법 개악’을 ‘합법적’으로 설명한다. 민주노총은 이번 개정노 동법의 복수노조 유예조항에 따라 국내에서는 ‘불법단체’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한 민주노총이 TUAC 회원인 국제자 유노련(ICFTU) 산하단체 자격으로 ‘합법적’으로 OECD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다. TUAC 회의는 기업산업자문위원회(BIAC) 회의와 함께 각각 노동자 와 사용자쪽 주장을 ELSA 회의에 전하는 일을 맡고 있다. OECD의 대다수 회원국들은 이렇게 분명한 실체가 있는 단체를 ‘불법단체’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한국의 개정노동법이 국제수준에 못 미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고, 인권침해로 비쳐질 것”

한편 정부 관계자들과 경총 등 재계 대표들은 개정 노동법 중 정리해고제 와 변형근로시간제 등 노동시장 유연화 관련 조항은 비판의 강도가 낮을 것이란 ‘희망’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 조항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OECD 국가들도 채택하고 있는 조항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월11일 방한한 ICFTU 관계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목소리를 높이지 않 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부분도 과연 정부 희망대로 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는 게 민주노총·한국노총의 분석이다. 노동계에서는 “OECD 회원 국들의 노동시장 유연화는 노동조합 등 노동계의 존재를 인정하고 노동단 체와의 협의 아래 진행한다”면서 “개정노동법처럼 노동자의 입지를 철 저히 부정한 채 노동시장 유연화를 진행하는 것은 OECD 국가들에게 인권 침해로 비쳐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설사 노동시장 유연화 조항들이 강도높은 비판을 피한다 하더라도, 복 수노조 문제 등 명백한 ‘수준미달 조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 부가 OECD 회원국들의 ‘성토’를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존 애번스 TUAC 사무총장도 “이번 고용노동사회문제위원회의 초점은 노동시장 유연 화가 아닌 복수노조 금지 등 노동기본권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과연 OECD가 가입 당시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한국 정부에 가 할 ‘제재 수준’이 어떨까도 회의 내용 못지 않은 관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는 “OECD는 신사도를 바탕으로 한 클럽성격을 띠고 있어 주요 결정사항에 대한 강제이행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며 제재 가능성을 부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OECD의 가장 큰 제재는 바로 국가적 위신 추락과 신용도 저하”라는 반대 목소리가 높다. 우선 1월22일 ELSA 회의에서 참 석 회원국들이 한국의 노동법 개정을 ‘개별 권고’하는 것이 한국 정부 에는 만만치 않은 부담이 될 것이다. 이미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노 동법 재개정을 요청하겠다”고 밝힌 미국뿐 아니라 상당수 유럽국가들이 이런 비판 목소리에 가세할 경우 이는 어떤 제재보다 큰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이날 ELSA 회의 토론 결과는 곧 보고서로 작성돼 OE CD 이사회에 제출된다. 따라서 이사회에서 또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국 정부에 ‘이사회 권고’를 요구할 가능성도 크다.


WTO에서 잇따라 거론될 수도

그러나 더 큰 문제는 OECD에서 논의되는 사항은 상당수가 1~2년의 시차를 두고 강제성을 띤 세계무역기구(WTO) 등에서 거론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전경련 국제경제실 이철행 조사역은 “부패라운드 등 최근 무역기구 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들도 이미 1~2년 전부터 OECD에서 논의돼온 사항” 이라며 “OECD의 권고는 단순한 권고 이상의 위력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

결국 지난해 날치기로 통과된 개정노동법의 독소조항은 OECD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한국의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노동조건을 논의하는 ‘블루 라운드’를 자극하는 등 국제사회에 만만찮은 파장을 남길 전망이다.

김보근 기자, 파리=최연구 통신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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