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한겨레21

외신기자들 “대한민국 정말 웃긴다”

(사진/명동성당에서 취재활동을 벌이고 있는 외신기자들. 한국의 `날치기'사건에 대해 `권위적이고 파시즘적인 행위'였다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썼다.)

“새벽 날치기로 개정된 노동법의 내용보다는 국민들이 왜 분노하고 있는 지에 취재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26일 새벽 노동법이 날치기에 의해 개정된 이후 현재까지 노 동계의 파업을 취재해온 한 외신기자의 말이다. 비교적 합리적이고 공정 한 보도를 중시하고 있는 서방 신문·방송인들은 이번 노동법 파문에 ‘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노동법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정부여당이 국 민을 기만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악법도 법이다’ ‘단지 법 통과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논리로 양비론을 내세우고 있는 국내 일부 언론, 방송과는 상당히 다른 시각이다.


날치기는 ‘재벌 사보타지’결과

외국 유수의 언론인 가운데 상당수는 우선 이번 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한 국 정치문화의 후진성을 만천하에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지적한다. 문민정 부가 출범한 지 5년째이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해온 지 수십년이 흘렀으 나 아직도 구시대의 정치관행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반응이다. 이 들은 정부·여당에 의한 노동법의 날치기 통과가 ‘권위적이고 파시즘적 인 행위’였다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사용해 이번 사태가 외국 언론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미국 유명 언론사의 지국장 은 “현 정권이 과거 전두환이나 노태우정권 때보다 더 권위적인 것 같다 ”면서 “한국 정부가 선진국가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의 정식회원국으로 승인되기가 무섭게 가장 유치한 후진국가의 관 행인 ‘날치기’(railroading)를 감행한 것에 대해 서방선진국가들은‘배 신감’까지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유럽 방송사의 한 기자는 이번 노동법 개정안이 기업의 경쟁력을 높 이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라는 정부의 설명에 대해서 “미국·유럽과 같이 오랜 역사와 시행착오를 통해 실업자에 대한 사회보장책 등이 거의 완벽 하게 갖춰진 선진국의 관행을 전혀 그렇지 못한 한국에 그대로 적용한다 는 것은 말도 안 된다(absurd)”면서 “이는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꼴 ”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노동계 시위현장을 취재하는 한 외국기자는 노 동계의 조직적인 시위가 전례없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 이번 사건을 통해 한국의 위기는 국민의 수준이 정치권의 그것을 훨씬 넘 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일본의 한 일간지 기자는 “이번 노동법 개정이 김영삼 정부의 집권초기 재벌개혁 정책과는 달리 재벌과의 밀착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분 명히 보여주는 사례”라면서 “노동법의 날치기 통과는 사실 재벌들이 ‘ 사보타지’한 결과”라고 규정했다. 재벌들이 경제위기를 과장해 정부여 당을 압박한 조직적인 반발의 결과라는 지적이다. 그는 “재벌의 소유를 분산하고, 제6공화국에 비자금을 제공한 재벌총수에 실형을 선고하는 등 강력한 재벌 개혁정책을 펴왔던 현 정부에 불만을 가져왔던 재벌들이 정 부가 복수노조와 3자개입을 허용할 조짐까지 보이자 심각한 위기감에서 ‘경제위기카드’를 마지막으로 들고 나온 것 같다”면서 “재벌들은 노 동자의 높은 임금이 기업경쟁력에 가장 장애가 된다고 주장, 노동자 길들 이기에 힘을 쏟고 있으나 사실 노동자는 정부와 재벌 사이 파워게임의 희 생양으로 봐야 한다”고 색다른 분석을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가장 먼저 세계화될 대상은 정치권”

한편 일부 서방 기자들은 “처음에 정부여당은 한국 국민들이 날치기 입 법처리에 익숙해 있어 파문이 그렇게 커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고 분석하면서 “국가목표로서 세계화를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해온 집권층은 이번 사건을 통해 설득력을 잃게 됐다”면서 정치권이 가장 먼 저 세계화되어야 할 대상임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고 비꼬았다.

<파이스턴 이코노믹리뷰>의 심재훈 서울지국장은 “한국은 지금 총체적인 신뢰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면서 “정부여당의 노동법, 안기부법 개정 안의 날치기통과는 권력이 국민을 우습게 알고, 다수의 횡포에 의해 의회 내의 토론문화가 실종됐으며, 언론이 국민여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서로 불신하고 있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또한 “한 국의 경제발전이 정치발전으로 이어져 개발도상국에 새로운 희망의 패러 다임으로 소개되길 원했다”는 심 지국장은 이번 한국 정부여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이러한 기대가 무산됐다며 크게 아쉬워했다.

임을출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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