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
|---|
(사진/한국사회 민주화의 주변부에 있던 노동자 계급이 이제 가장 중요한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깃발이 다시 오르고 있다.”
정부여당의 노동관계법·안기부법 날치기 처리로 촉발된 노동자들의 ‘1 월 총파업 대투쟁’은 장기적으로 한국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
이와 관련해 가장 주목되는 분석은 이번 ‘1월 총파업 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 이는 87년 6월항쟁으로 틀을 갖추기 시작한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질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해 국내외적으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 다.
“시민사회를 이끌어낼 싹”
총파업 투쟁 양상을 줄곧 가까이서 지켜봐온 언론인 출신의 한 재야인사 는 “90년대들어 전세계가 자본주의 단일시장으로 급속히 재편되면서 한 국사회도 총자본의 정치· 사회적 지배력이 강화되고 있다. 이번 시위 양 상의 가장 큰 특징은 이에 대응한 노동자와 일반 시민의 이해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결합 및 연대의 가능성을 높인 것”라 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이런 내외적인 환경의 변화는 강력한 대중 조 직체인 노동운동이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시위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노동전문가 시민운동가 학자들도 대체로 같은 견해를 내놓고 있다. 과거 우리 시민사회운동이 지식인, 학 생 중심의 민주화운동이나 개별 시민운동 차원이었다면, 이번 총파업 투 쟁은 앞으로 노동운동이 비판세력의 중추적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직후 벌어진 한국의 총파업 사태에 깊은 관 심을 보여온 외국 주요언론의 분석도 비슷하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르 몽드>는 지난 1월16일 총파업 분석 기사에서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서 비롯된 한국의 위기는 새로운 사회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라고 보도 했다. <르몽드>는 이어 “민주노총의 권력과의 대결은 노동문제를 넘어서 서 시민사회를 동원해낼 수 있는 싹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번 총파업 투쟁이 “새로운 사회세력” “시민사회를 이끌어 낼 싹”으로 보는 근거들은 무엇인가.
우선 전문가들의 분석대로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 선진국 진입 전략이 자 연스럽게 노동운동의 부활을 이끌어내고 있음을 이번 총파업 투쟁이 보여 주고 있다. 자본주의 경쟁의 격화는 각국에게 같은 수준의 경제활동 및 노동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날치기 처리에서도 보듯이 아직도 낮은 민주주의 수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제구조, 미약한 사회보 장 복지제도, 노동조합활동의 제약 등 후진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 다. 경제불황, 정치불신 등이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 총파업 시위가 6월항쟁 이후 가장 괄목할 만큼 화이트칼라를 비롯한 전 사회적 지지를 불러일으킨 것은 이런 상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 특히 고용안정 등 사회보장, 복지문제에서는 앞으로 노동자의 이해와 시민사회의 이해가 점차 분리되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 위하게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정치학)는 “자본주의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어 단순 히 노동과 자본의 문제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이번 총파업은 노동과 자본 의 문제가 그 중핵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환경이나 여성문제 등을 많이 얘기하지만 그런 운동으로 이번 파업이 가져온 것과 같은 충격을 가 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새삼 노동운동이나 노동자계급이 사회변동을 주 도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 정치의식 성장도 한몫
노동운동의 질적 성장도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핵심 요인이다. 지난 95년 12월 발족한 민주노총이 비합법 상태에서도 불과 1년만에 엄청난 조직력 과 대중 장악력, 그리고 국민적 지지를 상실하지 않은 유연한 전략을 구 사하며 줄곧 시민사회운동단체를 주도한 지도력 등을 보인 것은 한국 노 동의 질적, 양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영삼 한국노 동사회연구소 연구원은 “민주노총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싸움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87년 이후 지금까지 노동운동이 쌓아온 조직역량과 투쟁역량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고 있다. 이와 관 련해 민주노총-한국노총의 첫 공동투쟁 합의도 향후 노동운동의 성장과 관련해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는 평가도 뒤따르고 있다.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의 성장도 새로운 변화를 앞당기고 있다.
이민영 연구원은 “비록 구체적인 행동 슬로건은 아니지만 정치적 구호가 자연스레 분출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의식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징 후”라며 “이것은 더이상 개별 사업장의 근로조건 개선이나 임금인상 등 자신의 이익만을 내건 싸움이 아니라 절차적 민주주의 회복운동의 주역으 로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김명호 정책부장은 “이번 운동의 최대 성과는 노동운동의 민중민주운동, 사회운동과의 결합이 현실적으로 가능 하고 그 중심에 노동운동이 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노동현 장 내부의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노동문제뿐 아니라 제 반 사회 민주화 및 세제정책 등 제도개선 투쟁에서 노동운동이 계속 주도 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전망은 재야 시민운동단체에서도 나오고 있다. ‘참여민주사회시민 연대(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은 “노동운동은 이번 파업을 통해 전 국적인 세력으로 등장했다. 특히 민주노총은 전국 사업장을 동시에 움직 일 수 있는 세력임을 보여줬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사회 민주화의 주변부 에 있던 노동자 계급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부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 본다. 그는 또 “그동안 신중간계급으로 분류된 화이트칼라층, 즉 사 무전문직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사회학적으로 볼 때 그들도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결국 이런 전체적인 움직임 은 앞으로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이 한국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다른 관계자는 “정부여당의 날치기라는 절차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분노로 발현된 것이지만 결국 정부가 앞으로 다양한 사회적 문제 등에 제 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문제에 광 범위하게 개입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고 본다. 사회민주화의 주도 세력으로 완전히 정착하느냐는 아직 예단할 수 없지만 민주노총 등 노동 운동이 사회운동에서 결코 무시할 수없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할 것은 분명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노동운동의 성장을 곧바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가능성으로 연결짓는 것은 아직 무리라고 보고 있다.
새로운 노동자관·정책수립 절실
김기식 정책실장은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이해를 담보할 조직 즉 산업별 노조와 정당이 없이 정치적 성장은 어렵다. 또 대기업노동자와 중소기업, 단순제조업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과 임금 차이에서 오는 갈등의 극복 문제 도 있다. 문제는 얼마나 더 노동자의 의식화·조직화를 이뤄내느냐가 앞 으로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영 연구원은 “국민들이 서서히 보수일색의 정치권이 노동자의 이해 를 대변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는 과정에 있으나 정당문제로 나아가 는 데는 자금조직 등 현실적 측면과 지역주의라는 벽이 도사리고 있다” 고 지적했다. 그러나 외국 노동운동이 사회중심운동으로 부상한 계기가 대부분 사회보장 복지제도와 연관된 투쟁을 통해 국민적 지지를 획득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노동계가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임영일 경남대 교수(사회학)도 노동자 정치세력화 움직임은 우리의 현실 적인 정치구조,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에 비춰볼 때 시기상조라는 데 의견 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파업이 “즉자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나 기 업별 체제의 틀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의 질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조직재편과정만 제대로 밟을 수 있다면 한국 노동운 동이 한차원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전문가들은 정부도 이런 노동운동 안팎의 환경변화를 받아들여 구태 의연한 이념시비성의 발상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덧붙여 지적하고 있다. 정부의 새로운 노동자관과 정책수립이 절실히 요 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1997년 1월 한국의 노동운동은 과연 “시민사회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싹” 인가.
분명한 사실은 정부나 경제계가 노동자와의 공존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자 세를 보여주지 않는 한 이 물음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더욱 급속하게 증가 하리란 점일 것이다.
이인우 신승근 김창석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