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오귀환 편집장
1997년01월30일 제 143호 한겨레21

항쟁, 마지막 승리의 길

우리는 늘 패배에 익숙해 있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역사의 좌절이 민중과 시민을 고난으로 몰아넣었던가.

그래서 생각있는 이들은 이런 물음을 자신과 민중에게 던지곤 했다.

왜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이 끝났다고 말하는가?

왜 4월혁명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왜 광주민중항쟁은 지금도 계속돼야 하는가?

왜 다시 우리는 6월항쟁의 정신을 되살려야 하는가?

어렵게 이겼어도 결국은 역사의 반동으로 왜곡되고 짓밟히는 혁명과 항쟁 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끝내 배신받는 고통의 시대들… 그래서 모든 혁명과 항쟁은 이 땅에선 다시 현재진행형이 된다. 완결되지 않은 혁명으 로 각인되고 되살려야 할 항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혁명과 항쟁에서 배우자

다시 우리는 하나의 소중한 ‘항쟁’ 앞에 섰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 기 개악에 대해 노동자들과 시민이 합심해서 일으킨 ‘97년 총파업시민항 쟁’이 그것이다. 앞으로 역사는 이렇게 부를 것이다. 그 도도한 분노의 물결은, 저 용기있는 저항의 함성은 바로 총파업시민항쟁이었다고 기록할 것이다. 아직 승패를 알 수 없지만 그렇다. 이긴 것만 항쟁인 것은 아니 기에 그렇다.

이 중대한 순간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동안의 혁명과 항쟁을 기억해야 한 다. 거기서 배워야 한다. 지금 우리가 어떤 길로 가느냐에 따라 이 항쟁 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진실로 민중과 역사가 승리하는 참된 항쟁 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 할 때인 것이다.

두 가지만 말하자.

하나는 진실로 새로운 공동체의 판을 짠다는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다. 정치권으로부터 항쟁의 대오를 세운 사람들 그리고 우리 일반 시 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새로운 판짜기의 각오로 나서야 한다.

보자. 노동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의 밑바닥에는 삶의 질과 경제민 주주의의 요구가 깔려 있다. 빵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권과 자본쪽은 현재의 경쟁력 저하에 대한 책임을 노동쪽에 강제로 뒤집어씌우는 논리를 편다. 고비용의 주원인이 노동비용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 이 논리를 깨기에 앞서 우리나라에 2백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 이 10만 가구라는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의 다 땅부자다. 바로 이들의 재산을 위해 땅없는 수천만의 서민대중들이 뼈빠지게 일한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구조로 돼 있다. 기업 역시 이 높은 땅값 때문에 죽을 지 경인 것이다. 노동쪽에서 보면 이런 주거조건이 고비용의 주요인이다. 엄 청난 비율로 가처분소득을 빼내가는 사교육비가 바로 고비용의 주요인인 것이다.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고 있다는 서구 나라들은 이런 노동쪽의 고비용을 사 회복지제도로 해소하고 있다. 집과 교육에 대해 상당한 완충장치를 마련 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 복지제도에 형편없이 미치지 못하는 한국이 똑같은 정리해고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높은 주거 비용과 사교육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강행되는 정리해고, 변형근 로 따위는 노동쪽에는 ‘살인행위’와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 동자들과 화이트칼라까지 분노한 것이다. 이제까지 묻혀 있던 우리 사회 의 구조적 잘못에 대해 새롭게 각성하고 몸으로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일을 해온 우리 노동월급쟁이들이 이렇게 대우 받아야 하는가? 우리의 가처분소득은 왜 사라지고 있는가? 어디로 빠져나 가고 있는가? 뿌리로부터 묻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수와 전술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그러므로 이번에 노동법을 다시 고치는 방향은 이런 우리의 구조적인 문 제를 발본적으로 해결하는 게 돼야 한다. 단순히 문제된 법규정을 바꾸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좀더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고, 경제민주주의의 정신을 살리는 발본적 개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개악된 안기부법 역시 인간다운 삶과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접근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게 진실로 우리 모두, 우리 공동체가 사는 길이다. 21세기를 여는 유일 한 희망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이처럼 중대한 판짜기를 위해선 모두 가슴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으로부터 정치권 재계 노동계 일반시민들 모두 작은 수와 전술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휩쓸어온 잔재주의 관성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대통령선거보다 기업의 당해년도 회계결산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큰 것을 위해, 함께 살기 위해 넓고 깊게 보는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 사회의 구조개혁과 함께 우리 모두의 정신혁명을 함께 이룰 때 ‘총 파업시민항쟁’은 참된 마지막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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