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전태일의 누이 전순옥이 영국에서 말하는 노동법 개정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제2의 전태일을 원하는가

“아! 한국 정부는 또다른 전태일을 원하는 것일까.”

지난 연말부터였다. (BBC) 등 영국 언론들이 연일 머릿기사로 한국 노동 자들의 파업 소식을 전해주면서 나는 이런 불안감에 시달려왔다. 군사독 재시대 때도 안저랬다 싶은 법안 날치기 통과, 정리해고제·변형근로시간 제·대체근로제 등 독소조항만 모아놓은 듯한 새 노동법, 그에 반발해 삭 발을 한 노동조합 지도자들, 그리고 노동자의 총파업 물결….

누더기 노동법마저 사형시킨 날치기

이런 것들이 나에게 불현듯 ‘또다른’ 전태일을 떠올리게 한 모양이다. 26년 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죽어간 나의 오빠 전태일. 19 70년 11월13일 그 다정했던 오빠는 ‘지켜지지 않는’ 근로기준법을 화형 시키면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았다. 울부짖는 어머니와 가족들 모습은, 그리고 오빠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은 열서너살의 어린 가슴에 도 지워지지 않을 아픔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난 1월11일 영국의 진보신문 <가디언>에서 ‘또다른 전태 일’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했음을 보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신문엔 울산 현대자동자의 한 노동자가 노동관계법 날치기 국회통과에 항의해 분신하 는 장면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 의 통곡소리가 이곳 영국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마음 속에서 몇번이나 도리질을 했다.

태일이 오빠가 몸을 불사른 지도 이미 3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강산 이 3번 바뀌었을 이 기간에 정부와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태도, 열악한 노동환경 등은 그 당시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지난해엔 ‘노동 법개혁위원회’ 활동을 들으면서, 이번에는 어떠한 불상사도 치르지 않고 상호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겠다는 일말의 기대도 가졌 었다. 이런 나의 간절한 바람은 국회 날치기통과를 보면서 그대로 무너졌 다. 지난 30여년간 한국의 노동법은 군사정권의 수차례 개악으로 누더기 가 되어왔다. 그것은 노동자와 민주인사를 탄압하는 도구였고,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수배·구속·고문·해고하며 노조를 깨뜨 리기 위한 목적에 이용되는 법이었다. 이러한 노동법이 개정돼 제모습을 찾을까 하는 기대가 지난해 말 국회 날치기통과로 철저하게 짓밟혀버린 것이다.

이전의 비민주적-반노동자적 노동관계법 아래에서도 노동자보호조항 그리 고 노동운동 보호조항은 존재했다. 존재했으나 기업과 정부는 필요하면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전태일의 외침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였다. 하지만 정리해고제 등 독소조항을 안은 채 이번에 개악된 노동법은 그것 을 지키라고 할 수도 없게 돼버렸다. 70년 그 열악했다는 노동환경보다 어떤 면에선 더 나빠진 모습이다.

런던을 한번쯤 방문했던 사람이면 영국신사의 체통과는 거리가 먼 광경,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한푼의 동전을 구걸하는 수많은 걸인들 의 모습에 당황했을 것이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노동악법 철 폐’의 머리띠를 두른 한국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도를 통해 보면서 나에 게는 그 걸인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영국 정리해고제 도입 이후 걸인 늘어

지난 80년 초 영국의 총리였던 대처가 도입한 노동관계법 중 하나가 정리 해고제였다. 영국의 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라는 미명 아래 수년 아니 수십년간 몸 담아온 일터에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났다. 많은 사람들 이 실업자가 되고 가정은 파탄되며 재취업의 희망을 잃은 채 알코올중독 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지금도 열명 중의 한명은 해고의 불안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부당한 대우에도 제대로 한번 대항도 못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개 인적으로 안타까워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이런 문제가 바로 한국 의 현실로 다가온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정리해고제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의 불안에 떨게 될까? 기업과 정부의 압력에 얼마나 주눅이 들까?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 을까?

이곳에서 비교노동학을 전공하며 6년을 보낸 느낌은, 우리는 결코 이곳처 럼 노동자에게 가혹한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번 정리해 고제에 의해 직장을 잃게 되면 재취업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다. 이번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법이 우리에게 실업과 절망의 날을 가 져올 것이라는 불안은 10년 만에 찾아온 이상추위와 함께 우리의 가슴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다.

대체근로제는 또 무엇인가? 가게에서 물건 사듯 노동자들을 언제 어느 때 나 필요에 따라 고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대체근로제가 노동자들의 유일한 무기인 파업을 무력화시킬 것은 뻔한 일이다. 파업현장에서의 파 업노동자와 대체 노동자의 대립, 그것은 70~80년대 구사대가 대체노동자 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영국에는 ‘스캡’( scab)이라는 것이 있다. 파업을 파괴하는 노동자라는 뜻인데, 이들은 대 체노동자로 임시 고용되거나 파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과 파업 노동자들이 맞서 싸우는 광경을 영국의 산업현장에서 90년대 초까지만 해 도 가끔 볼 수 있었다. 이 관행도 역시 대처 정부에 의해 도입되었는데 영국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이러한 제도들은 전 영국 총리 대처가 소위 영국병을 고치려고 도 입한 도구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반노동정책이 ‘영국병’을 고쳤는가? 영국사회에서 정녕 일하는 사람들의 비전은 존재하는가?

김영삼 정부도 마찬가지로 노동관계법의 개악으로 한국의 노동운동을 약 화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으로 이 새로운 제도에 의해 권리 를 침해받고 고통받을 한국의 노동자들을 생각하니 척박했던 70~80년대의 노동현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성사업장에 구사대를 동원해 파업 에 참가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구타하며 똥물까지 먹였던 탄 압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까지 한 한국의 노동법은 19세기로 후퇴하는 것인지, 21세기로 가는 이 시점에서 ‘자본만에 날개’를 달아주려는 것인지 소리쳐 묻고 싶다.

노동자 대투쟁은 국가경제를 지키는 일

이번에 날치기로 통과시킨 노동관계법이 자본가들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노동자들에겐 엄청난 불이익을 준다는 것은 누가 봐도 뻔한 것이다. 70년 대에는 워낙 척박했기 때문에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이었듯이, 지금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일터를 지키며 국가의 경제를 위해, 대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전태일이 죽음을 각오했을 당시 그의 생각은 호소만으로 아무 문제도 해 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을 게다. 억압자의 마음이란 구약성서 출애굽기 속 의 바로왕의 마음이 보여주듯이 굳고 완고한 것이다. 권위만으로 똘똘 굳 어진 업주들이 평화시장의 어린 소녀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고통에 어떻 게 따뜻한 연민과 관심을 갖겠는가. 또한편 정부의 냉대와 탄압, 사회의 무관심으로 스스로 커다란 한계의 벽에 부닥치게 되었고 끝내는 자신의 희생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하루하루 자신도 모르게 죽어가는 어린 여 성 노동자들을 대변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 그리고 한국의 학자들이 입을 모아 지난 30여년간 이 루어온 한국의 경제성장을 기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한국 의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던 주 요인을 분석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한 가 지를 빼놓고 있다. 노동자들의 손이다. 60~70년대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 던 노동자들을 무시하려 드는 것이다. 툭하면 수출이 마비되느니 경제가 위기에 처하느니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손을 놓은 노동자들 에게 책임을 묻기에 바쁘다. 그렇다면 하루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는 어찌 이리 쉽게 무시될 수 있을까? 김영삼 정부가 주장하는 경쟁력은 누가 키우는 것인가? 노동자가 죽는데 기업과 국가가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한국의 기업과 정부는 입만 열면 국가경쟁력 강화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노동자를 억압하면 단기의 자본경쟁력 강화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나 중장기적으로는 국가경쟁력의 악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국가경쟁력의 요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가 자발성과 창의성을 담보로 한 노동을 통해 손끝에서 이루어내는 것 아닌가(기초과학·첨단기술에서 일본을 훨 씬 앞지르는 미국이 상품과 용역의 국가경쟁력에서 일본에 크게 뒤지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노동법 개악, 준엄한 심판 받을 것”

군사정권 때의 모습을 능가하는 내용과 형식으로 개악한 노동관계법으로 노동자들에게 자발성과 창의성이 담보된 노동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궁극 목표인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는 노동관계법 개악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슬픔과 함께 김영삼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느껴진다.

런던=전순옥/영국 워릭대 비교노동학 박사과정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