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골병든 금융권 홀로 세우라

(사진/금융개혁위원회 설치로 은행 증권 등 금융기관의 합병이 발등의 불로 다가섰다. 금융기관의 경쟁력을 높히기 위해서는 정치논리를 배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1월7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속기구로 금융 개혁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힌 뒤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대부분의 언론이 금융개혁위원회 설치를 계기로 은행 증권 등 금융기관의 합병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고 보도했다. 개혁이란 단어를 바로 새판짜기로 연결시켜 금융계가 우주탄생과 유사한 대폭발(빅뱅)을 맞을 것으로 추측하고, 이런 추측을 근거로 삼은 보도들이다. 이렇게 되면 금 융기관들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국가경쟁력이 향상될 것이라는 희망도 첨 부됐다.

금융계 새판짜기는 뒷전으로 밀려

개혁이란 단어는 금융이란 단어와 함께 쓰일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특혜대출, 문민정부 들어 줄줄이 수갑을 찬 은행장들의 모습, 생산성은 낮은데 급여수준은 높은 금융기관의 현실, 서민들에게 한없이 높은 은행 문턱, 외국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금리, 담보만 요구하며 자기 몫만 챙기 는 듯한 은행창구, 뻑하면 터지는 증권사 직원들의 창구사고와 작전개입 ….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금융계의 일그러진 모습들은 개혁이란 단어 앞에서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다. 때문에 금융개혁은 그 자체로서는 누구도 거부 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제이다. 그러나 개혁이란 슬로건은 항상 개혁 적인 것만은 아니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금융개혁위원회는 첫 출발부터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우 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언론들이 기대감을 표시한 금융계의 새판짜기 는 당장의 고려사항이 아니다. 금개위는 기업편의와 금리인하를 위한 축 소판 개혁을 지향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말한 금개위의 구성 및 활동방향은 △기업인 위주로 위원회를 구성해 기업 등 수요자 중심으 로 금융산업을 개혁하고 △논의과정에서 재경원 금융실은 배제하며 △기 업들의 경쟁력 강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금리인하를 최우선 과제로 추구하 겠다는 것이다.

불안의 가장 큰 그림자는 재경원 관료의 배제에서 드리워지고 있다. 재경 원 관료 배제 원칙은 민간 주도가 아닌 청와대 주도의 금융개혁을 추진하 겠다는 의미다. 청와대는 재경원 관료를 배제하고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방침이 여론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자신하는 눈치 다. 재경원 금융실 관리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한을 움켜쥐고 규 제완화에 소극적인 탓에 금융이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는 금융계와 재계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 금융계를 퇴보시킨 관치금융의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금개위 설치계획이 발표된 다음날인 1월8일 금융권에서는 묘한 일이 벌어 졌다. 제일은행 등 몇개 금융기관이 자금난에 허덕이는 한보철강에 1천2 백억원을 협조융자란 형식으로 빌려줬다.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뿐 아니 라 한보철강과 별다른 거래관계도 없는 다른 은행들이 이 회사의 부도를 막기 위해 위험부담을 안고 자금을 대출한 것이다.

협조융자는 95년 수조원의 빚더미에 올라앉았던 우성건설을 금융권이 공 동으로 지원하면서 생긴 말이다. 어차피 망할 우성에 대해 돈을 빌려주기 를 꺼리는 은행들을 정부가 ‘국가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내세우며 반강제적으로 대출할 것을 설득했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협박융자 ’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성이 망해버린 지금 이 수천억원의 협조융자는 부실채권으로 변해 국가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재경원 배제 정치 입김만 세진다

당시 재경원 금융실 당국자들은 우성에 대한 금융지원 요구에 대해 ‘자 리를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 라고 입을 열지 못하는 정치권 등 윗선의 힘에 밀려 결국 지원이 결정됐 다. 일선에서 금융권을 핍박한 것은 물론 재경원 금융실이다. 때문에 자 금난을 겪고 있는 한보에 대한 이번 금융권의 무제한적인 대출과 관련해 서도 정치권 등 고위층 관련설이 난무하고 있다.

이렇듯 개발독재시대부터 관치금융의 장본인은 정치권이고 재경원 금융실 은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금개위 설치계획의 금융실 배제 원칙은 껍질만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 정부 들어와서도 대선 때 밉게 보인 현대그룹의 현대증권에 대한 유상증자 불허와 계열기업의 해외 증권 발행제한 등, 법과 제도보다는 고위층의 의중에 따라 금융정책이 집 행된 사례가 많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금융개혁을 추진하면서 우리나라의 재경원격인 대장성 을 배제하고 총리 직속으로 개혁기구를 설치한 것을 예로 들면서 관료배 제 원칙의 타당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일본은 관료들의 힘이 정치권을 견 제할 수 있는 반면 우리나라의 관료집단은 정치에 완전히 종속돼 있다. 일본의 금융개혁에서는 관료배제 원칙이 중요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선 관료 배제에 앞서 정치논리의 배제, 정치권의 배제를 선행시켜야 한다.

구 재무부의 별칭으로 모피아라는 말이 있다. 의리로 똘똘 뭉친 미국의 폭력조직 마피아에 빗댄 말로, 기획원과 재무부가 합쳐진 재경원도 같은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관치금융의 틈바구니에서 각종 규제를 움켜쥐고 금융기관에 낙하산인사를 일삼으면서 선후배간의 끈끈한 봐주기로 금융기 관을 지배하고 있는 행태를 비꼬는 말이다. 이같은 행태가 이번 재경원 배제 원칙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관치금융의 큰손 은 그 뒤에 숨어 있다.

청와대의 금개위 설치계획에서 느껴지는 두번째 그림자는 기업인 중심의 위원회 구성방침과 단기과제로 금리인하가 선정된 데서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은행 등을 금융기관이라고 부른다. 각종 법규가 은행 보험 등 을 기관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은 기업이고, 증권회사도 기업이 다. 보험 종금 리스 신용금고 등이 모두 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와 마 찬가지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고, 어설프지만 돈을 많이 벌려는 주인( 주주)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이들이 금융회사나 금융기업이 아닌 금융기관이다.

영국 미국 일본 등 금융개혁을 성공했거나 금융개혁을 추진하고자 하는 나라들의 금융개혁 방향은 모두 금융기관을 기업다운 기업으로 만드는 것 이다. 독자적인 장사논리에 따라 영업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망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고 업종을 바꾸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비교적 자유스 럽게 개혁도 추진된다. 금융업종의 ‘자율적’인 경영을 보장해 금융산업 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개혁위원회를 금융인이 아닌 기업인 중심으로 하고 주요과제 로 금리인하를 선정한 것을 보면, 청와대는 금융기관을 기업으로 만들기 보다는 다른 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인식하고 있 는 셈이다. 한정된 자원을 전략산업에 집중투자하는 불균형성장시대에 금 융기관을 자금동원의 단순한 창구로 인식하던 발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금융 홀로서기 능력 키워야

특히 금리인하를 주요 정책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점은, 청와대가 시장기 능에 따른 금융기관의 영업을 제한하는 식의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금리인 하 정책을 펴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국제금융시장의 큰손인 조지 소로스는, 일본이 미국에 대해 막대한 무역 흑자를 내는 데 대해 콧방귀를 뀌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 제조 업체가 아무리 무역흑자를 내도 이를 보관하는 일본 금융기관의 경영기법 이 낙후돼 있어, 미국 금융기관들이 단번에 다시 쓸어올 수 있다.” 제조 업체는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만들어내는 반면, 금융업체는 환율 증권 파생금융상품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부의 이전과 분배를 담당하고 있는 현실을 짚어낸 말이다. 그의 말에서 금융기관의 역할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금융산업과 금융시장이 전면 개방 돼, 이제 국내 금융산업은 과거처럼 부실을 떠안은 채 정부의 보호 속에 안주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은 금융의 홀로서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 러나 금개위는 금융을 기업지원의 보조수단으로만 간주해, 이와 반대방향 을 지향하고 있는 인상이다.

이같은 금개위의 태생적인 한계는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한계에도 금개위가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한편으론 있다. 간헐적으로 지적돼 온 금융산 업의 모든 문제점을 한번에 노출시켜, 그동안 뒤에서 전문가들(특히 재경 원)끼리만 조물락거리던 금융산업 개편방안을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시킨 게 우선 첫번째 공로라 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속병 깊은 금융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종합검진을 통해 단계적으로 금융산업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처방전이 제시될 수도 있다. 금융산업의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 방안, 금융기관들의 기업으로서의 홀로서기 방안 등도 당연히 논의돼야 할 것이다.

최창환/ 서울경제신문 정경부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