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한겨레21

죽을 권리는 있는가

“나는 비록 환자가 요청하더라도 독약을 결코 주지 않을 것이며, 그런 내용을 상담하지도 않을 것이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살리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사의 기본 윤리를 밝힌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희미하게 꺼져가 는 생명 앞에서 단말마에 가까운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은 “좀더 추하 지 않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절규한다. 당신이 의사라면 어떻 게 할 것인가.


40여명 안락사 도운 의사 잭 커보키언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안락사금지법의 위헌 여부에 대한 심리에 들어가 고,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했다가 격렬한 찬반토론이 빚어 졌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두번째 말기 피부암 환자가 안락사를 택함으로 써 지구촌은 ‘죽을 권리’라는 풀기 어려운 논제를 놓고 논란에 휘말리 고 있다.

미국 의료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안락사 문제가 핫이슈로 떠오른 것 은 지난 90년 50대의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안락사를 도와준 것을 시작으 로 지금까지 40여명 이상을 안락사시킨 의사 잭 커보키언에 대해 검찰이 정식으로 기소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워싱턴주와 뉴욕주 순 회항소법원은 현행 안락사금지법의 위헌심판 제청을 연방대법원에 냈다. 위헌제청의 요지는 안락사 금지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 의 선택 자유권을 침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말기환자에 대해 생명연장 장치 거부를 허용한다면 다른 말기 환자들의 안락사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 1월8일부터 심리에 들어간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은 몇년 동안 심장병에 시달리다 자신을 안락사시켜줄 수 있는 의사를 찾지 못해 얼굴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자살한 사라 시너드 사건과 안락사를 요구했다 가 의사의 도움을 받는 자살이 인간성을 실추시킨다는 결론 아래 안락사 를 거부당했던 래리 매카피 사건을 심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다섯 달 뒤인 오는 6월께 최종결론을 내리게 된다. 현재 대법관들의 대부분은 안락사 허용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의사협회(AMA)와 미국의과대학학생협회(AMSA)도 안락사 반대를 공식화 했을 뿐만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안락사 허용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 현지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한편 지난해 6월 공식적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지난 1월5일 말기 피부암에 시달리던 제넷 밀즈(52)가 두번째로 안락사함 으로써 이를 둘러싼 격렬한 찬반 논쟁에 휩싸여 있다. 지난해 9월 첫 안 락사가 시행되고 난 뒤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서는 안락사에 반대하는 시 위가 줄을 이었다. 특히 안락사를 택했던 이의 아들이 “정부가 우리 아 버지를 죽였다”며 공격의 전면에 나서면서 반대여론은 절정에 달했다. 당초 안락사를 허용한 ‘말기 환자의 권리에 관한 법’을 발효하면서 “ 죽음에 대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될 것”이라고 밝혔던 정부도 격렬한 항 의에 부딪치면서 다시 불가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추세다.

안락사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치유가 불가능한 말기환자와 그 가족 들 및 그런 환자들의 임종까지의 과정을 괴롭게 지켜본 경험이 있는 의사 들이다.

말기 췌장암과 심장병 및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존 그래엄(63)은 자신의 다음 번 생일을 결코 맞고 싶지 않은 환자의 대표적 경우다. 초췌한 모습 의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난 15년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 는 고통과 싸우며 지금껏 살아왔다”면서 “그 정도라면 신에게도 양해를 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루가 천년 보다 긴 삶보다 차라리 죽음이 더 낫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개인의 문제 아닌 사회의 문제

그러나 말기환자 외에도 죽음보다 힘겨운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안락사 시행은 개인의 권리 차원을 떠난 한 사회의 윤리적 문제의 성격을 가진다. 안락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된다면 사회에서 버림받은 장애인이나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도 자신 의 힘겨운 삶을 이제 그만 끝내달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의 주장이다. 또한 수많은 치료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환자들의 경우 가족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안락사를 요구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가난하고 힘든 삶을 꾸려가는 환자들에게 가장 손쉽 고 싼 치료제는 역설적으로 극약인 것이다. 그러나 말기환자들과 그 가족 들의 요구는 너무도 절실하다. 지난해 26살의 딸을 안락사시킨 패티 로젠 (57)은 뉴스전문채널 와의 인터뷰에서 10시간에 걸친 딸의 안락사 순간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울고 또 울고 흐느끼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서 나는 딸의 동 맥으로 조금씩 극약을 흘려 넣었다. 죽음 건너 저편에서는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지 말라고 기도하면서.”

이태희 기자/ 한겨레 국제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3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