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차범근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월드컵 무대의 치욕은 없다

차범근(44)이 돌아왔다. 금의환향이다. 지난 94년 11월 프로축구 현대팀 의 저조한 성적에 책임을 지고 감독에서 물러났던 그가, 98월드컵팀 감독 으로 복귀한 것이다. 2년여 동안 그는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어린이축구 교실을 운영하며,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게 고작이었다. ‘뛰어난 선수는 결코 명장이 될 수 없다’는 말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지금 그 는 한국축구의 희망이다.

그의 영광 뒤엔 박종환이라는 냉혹한 승부사의 아픔이 깔려 있다. 지난 연말 제11회 아시안컵축구대회에서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그는 4강탈락이 라는 수모를 맛봤다. 특히 8강전에서 보여준 졸전은 한국축구의 치욕이자 , 그의 치욕이기도 했다. 국민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결국 그는 이번에 98월드컵팀 감독 후보로 올랐으나, 분루를 삼켜야 했다.

축구협회는 지난 1월6일 기술위원회를 열어 마라톤회의를 벌였다. 3시간 동안 세 차례나 정회하는 격론이 벌어졌다. 누가 땅에 떨어진 한국축구의 위신을 일으켜세울 수 있을 것인가. 기준은 분명했다. 현직 프로축구팀 감독이 아니며, 선진기술 접목 등 지도력을 갖추고, 또한 한국축구를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협회는 일단 여러 명의 외국감독을 검토했다. 루마니아의 앙겔 요르다네 스쿠(47), 불가리아의 디마타로 페네프(52) 등 94월드컵에서 4강권에 든 감독들의 이름까지 거론됐다. 니폼니시(53) 부천 유공 감독은 가장 유력 한 후보였다. 비쇼베츠 올림픽 감독과 같은 러시아 출신으로, 용병술이 검증된 데다 한국축구를 잘 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허정무 전남 감독, 차범근 전 현대감독 등 국내파 감독에 대한 얘기도 나돌았으나 목소리는 미약했다.

그러나 외국감독을 기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위험성이 있다는 의견이 협회 안에서 일기 시작했다. 우수한 외국감독을 새로 영입하더라도 한국선수들 에 대한 지도력이 검증되지 않아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이 없 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냥 외국감독 명단을 붙들고 있기엔 시간이 없었 다. 니폼니시 감독은 팀과의 계약문제 때문에 막판에 제외됐다.

기술위원회는 결국 박종환과 차범근, 2명을 이사회에 복수추천하는 방식 을 취했다. 모양새를 좋게 하기 위한 통과의례였고 한편으로는 박종환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라운드의 승부사 박종환은 그렇게 물러났고, 차범근은 그렇게 돌아왔다. 98년 월드컵까지 2년 계약에 연봉 1억5천만원의 조건.

지난 1월9일 ‘차범근호’가 출범했다. 빠른 축구를 구사하는 그의 스타 일에 맞춘 면면이 짜였다. 자신을 보좌할 코치에 4년 전 현대팀에서 한솥 밥을 먹은 조병득 할렐루야 감독을 불러들였다. 선수단은 대폭 물갈이됐 다. 전체 25명 중 15명이 교체됐다. 고종수(19·수원), 김정수(21·대전) 등 신예들이 대거 가세했다. 평균연령이 25.56살로 이전보다 3살 낮아졌 다. 일본으로 진출하는 고정운과 독일 진출을 모색중인 서정원을 포함해 노장 김주성과 신홍기, 강철, 허기태, 김판근, 이영진, 신태용 등은 제외 됐다.

차 감독은 황선홍을 아낀다. 그는 가장 뛰어난 골감각을 가진 선수로 황 선홍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3-5-2시스템에서 황선홍과 발을 맞출 투톱감으로 96프로축구 신인왕 박건하(수원), 김도훈(전북)에 최용수(안 양)가 추가됐다. 수비진은 스위퍼 홍명보(포항)에 이임생(부천), 김상훈( 울산), 김태영(전남) 등 체력이 강하고 대인마크가 좋은 악바리들로 교체 했다. 게임메이커 윤정환(부천)을 대체하기 위한 장기포석으로 고종수에 다 발빠른 조현두가 포함됐다. 나머지 주전은 문지기 김병지(울산), 하석 주(부산), 노상래(전남), 유상철(울산) 등이 뽑혔다.

차 감독은 1월7일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다. “그동안 내 가정 을 나름대로는 알뜰하고 부족한 점 없이 꾸려왔다. 내 가정과 같은 대표 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78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11년 동안 ‘갈색 폭격기’로 이름 을 드날린 차 감독이 98월드컵에서 또다른 ‘차붐’을 일으킬 수 있을지 지켜보자.

하성봉 기자/ 한겨레 스포츠레저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