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한겨레21

독선 부른 ‘망각의 정치’

(사진/"결코 소수의견을 무시하거나 묵살할 생각이 없이'던 김 대통령의 말은 거짓이었나. 지난해 12월26일의 날치기 현장.)

정치권에서는 흔히 정치를 종합예술로 표현한다. 대화와 설득과 협상의 종합물이라는 얘기다. 일방통행식 정치는 그만큼 파국의 위험을 안고 있 다는 정치권 스스로의 진단이 담겨 있다. 또 대화 상대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집권하고 있는 여당과 집권을 준비하며 여당을 견제하는 야 당이 있기 때문이다. 여야는 경쟁하고 대립하지만 정당정치를 떠받치는 두 축이다.


“야당은 반민주세력”

김영삼 대통령의 말부터 들어보자.

“민주주의 선진사회에서는 소수가 다수로 하여금 국회에서 표결을 하지 못하도록 의장실이나 의장공관을 점거하고 부의장을 식당에 감금하는 등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를 잘 하는 영국의 메이 저 총리를 만났을 때 야당보다 겨우 1석이 많지만 국정에 아무 지장을 받 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야당 총재들을 이 시점에서 만나서 무슨 해결 의 길이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현재로서는 만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 다”(1월7일 새해 기자회견). 야당이 영수회담을 요구하고 있는 데 대한 매우 사무적인 답변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김 대통령에게는 야당이 ‘반민주세력’이다. 따라서 대화할 상대도 아닌 것이다. 물론 김 대통령의 발언에는 지난해 12월26일 새벽 6시 안기부법과 노동법 개정안 등을 날치기 처리한 여당의 행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고 있음에도 김 대통령은 애써 외면했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날치기 처리’에 항의하는 교수, 종교인, 학생, 언론인 등도 ‘불법행 위’를 하고 있는 사법처리의 대상일 뿐이다. 이것이 김 대통령의 일관된 철학이었을까? 잠시 김 대통령의 과거 어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야당에 오래 몸담았던 경험에 비추어 결코 소수의견을 무시하거나 묵살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야당의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대안에 대해 남 다르게 귀를 기울일 것이며 소수의견을 존중할 것이다. 특히 평민당 김대 중 총재와는 오랫동안 정치생활을 함께 해온 동지로서 앞으로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우리의 공동목표인 민주발전과 통일을 열어나갈 것이다.” 9 0년 2월26일 민자당 최고위원 자격으로 국회에서 첫 대표연설을 했을 때 일이다. 또 이듬해 10월7일 국회 대표연설에서는 “민자당은 새로운 야당 이 나라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가야 할 정치적 동반자라 는 인식을 갖고 꾸준히 대화하고 협력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주요 현안 문제는 가능한 한 여야간의 합의를 통해 처리해 나가는 관행을 확립해 나 가겠다”고 했다.

어리둥절할 일이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야당의 평가를 들어볼 차례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 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시국 파탄이 격화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대화를 기피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가. 영수 회담을 거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거부이다”라고 공격했다.


정쟁 아닌 종합예술 기대한다

야당의 평가는 하나로 모아진다. 김 대통령은 야당을 ‘조화를 통한 협상 ’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굴복,평정시켜야 하는 ‘적’으 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설득과 대화를 통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기보 다는 다수당의 의지를 더욱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비판이다. 영수회담은 민주적인 국정운영의 한 과정이 아니라 한번쯤 야당의 요구를 들어주는 ‘시혜’의 대상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화라는 미덕이 비집 고 들어갈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야당은 ‘문민독재’라는 표현으로 김 대통령의 독선을 비난한다. 이러한 틈새를 놓치지 않고 야권 일부에서는 아예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고치는 개헌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 다.

김 대통령의 옛 주장대로 “공동목표인 민주발전을 위한 협력”의 노력이 정치권에는 절실하다. 특히 요즈음 전국은 총파업과 정부의 강경대응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그만큼 국민들은 정쟁이 아닌 종합예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김 대통령의 태도는 강고하기만 하다. 김 대통령은 과거의 정치철학을 잊었을까, 아니면 기억을 못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철학을 바꾼 것인가. 국민은 그것이 궁금하다.

김용성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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