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한겨레21

민심에 순응하라

이제 길은 하나로 좁혀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번 사태에 대해 총체적 책임이 있는 김영삼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해결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고통스럽지만 유일한 ‘희망’의 작업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민심에 겸 허하게 순응해야 한다.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개악이 야기시킨 대파업 투쟁이 점차 ‘정권 퇴 진’구호로 바뀌어 정치투쟁으로 전화돼가는 지금,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김 대통령이 현재의 사태에 대해 그 심각성과 폭 발력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다면 그의 자랑스러운 ‘감의 정치’도 전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와 노동자·시민이 전면적으로 대치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과 혼란이 몰아쳐 우리 공동체의 총 체적 위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를 푸는 길은 무엇인가.

먼저 두 문제법의 시행을 늦춰야 한다. 정부와 여당의 최고 책임자가 나 서서 문제법의 국회 재논의와 재개정을 위해 시행령의 제정을 무기한 유 보한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법의 국회 재개정을 위해 여와 야가 합의해 시민들 앞에 공동으로 선언해야 한다. 그 형식은 일부 야당이 제 시하는 것처럼 여야 영수회담에서 합의하는 것으로 될 수도 있다. 대통령 이 직접 나서서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방식이건 집권세력이 그 이니셔티브를 쥘 수밖에 없고, 그 결과에 대한 전시민적 합의를 위해서도 야당의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야당으로서도 이토록 사태가 악화될 때까지 기회주의적으로 사태 추이만을 지켜보며 외면해온 책임을 덜기 위해서라도 이 여야 협상에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 바람직한 방식은 김 대통령이 자신의 대결단을 더욱 의미있게 하기 위해 직접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의 대표자도 정치지도자들과의 회 담에 참석시켜 전국가적인 합의를 모색하는 길이다. 비록 이런 정치적 행 위가 김 대통령의 집권 말기 통치권 누수로 이어지는 사태도 있겠지만, 진실로 겸허하고 열성을 다해 이같은 이니셔티브를 성사시킨다면 그는 참 으로 의미있는 대통령으로 역사 속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갈 길은 멀고 시간은 없다.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게 더 어렵고 힘들다는 진실 앞에 겸손해야 한다.

한겨레21 편집장 오귀환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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