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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김세균/서울대 교수·정치학 |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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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26일 새벽, 집권당은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개악안을 전격적으 로 날치기 통과시켰다. 노동법의 개악은 노동자대중이 누려야 할 기본권 과 생존권을 위협하고 이들에 대한 자본지배를 강화함으로써 미약하나마 존재해온 ‘실질적 민주주의’의 싹을 송두리째 뿌리뽑는 것이었다. 또한 안기부법의 개악은 안기부의 수사권을 확대함으로써 ‘정치적 민주주의’ 를 크게 후퇴시키는 것이었다. 더구나 개악안의 날치기 통과는 가장 초보 적 수준의 민주적 절차인 ‘의회민주주의적 절차성’조차 무시한 망동이 었다.
종말 고한 ‘위로부터의 민주화’
실질적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지배세력의 공세는 1980년대 이래 전세계적 수준에서 기본적으로 ‘신보수주의적 공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 조류 속에서 그 공세는 우리 사회에서 정권의 수구보수화와 이에 고무되고 있는 독점재벌들의 천민적 수구성 등으로 말미암아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도 한층 더 강도높게 실질적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공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정권이 앞장서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절 차적 민주주의에 흠집을 내고 있는 것은 그간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진 ‘ 위로부터의 민주화’과정이 이제 종말을 고했음을, 그리고 지배세력이 그 나마 제한적으로 도입되었던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조차도 본격적으로 허물어뜨리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배세력의 이러한 공세는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주축으로 하고,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보조축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권이 자본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집권 연장 등 을 위해 위로부터 민주주의를 난도질한 1996년 12월26일은 동시에 민주주 의를 소생시키려는 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이 밑으로부터 솟구쳐 오른 날 이다. ‘민주노총’산하 노조들이 주도한 노동자투쟁은 전체 노동자대중 과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연말 연초의 휴지기를 넘기면서 이 제는 더 많은 지역과 부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나아가 이 투쟁은 민주주 의의 진전을 바라는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을 동참시키면서 전 국민적 연 대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투쟁이 지닌 의의는 실로 지대하다. 무엇보다 이 투쟁 속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 지배세력의 공세에 대해 놀라운 투쟁력 을 발휘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한국노동자들의 이러한 투쟁은 계급타협체 제에 안주해 있었던 선진자본주의체제의 노동자들이 1980년대에 지배세력 의 공세에 무력하게 밀리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서야 비로소 자신의 투쟁력을 회복하고 있는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이 투쟁을 통해 ‘민주 노총’은 일거에 1천2백만 한국노동자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한국 노조 운동의 명실상부한 전국적 구심체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 투쟁 을 통해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와 진보를 명실상부하게 주도하는 힘으로 급격히 부상함과 더불어 세계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배세력 의 반동적 공세에 대한 저항의 전형을 창출하면서 전세계 노동운동 발전 의 새로운 기폭제를 제공하고 있다.
모두 함께 새 역사를 만들어나가자
노동자 총파업투쟁이 주축을 이루면서 전 국민적 연대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이 투쟁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그 반민주성과 반민중성을 노골 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지배세력의 ‘반민주적 신보수주의 공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기본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이 투쟁은 실질적 민주주 의를 위한 투쟁을 중심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결합시키고 있으며, 운동의 주체-목표면에서 1987년 6월의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과 1987년 7, 8월의 노동자대투쟁의 한계를 모두 뛰어넘는 새로운 형 태의 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투쟁이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지배세력의 ‘가식의 민주주의’와 보수
야당의 ‘회색의 민주주의’와 구분되는, 사회 속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열망을 참답게 대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이다. 지금은 동터
오르기 시작한 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온전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이 새로
운 민주주의가 가식의 민주주의나 회색 민주주의에 의해 유린당함이 없이
만개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작업에 함께 나서야
할 때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