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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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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국민이 ‘오해’를 풀면 이번 날치기노동법이 ‘선진국형’이라 는 사실이 보인다? 정부당국자들이 날치기노동법을 변호하는 논리다. 과 연 그럴까. <한겨레21>은 법조항을 근거로 ‘날치기노동법 시행 시나리오 ’를 만들었다. 정부의 논리가 정당한 설명인지, 궁색한 변명인지를 판단 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편집자
김자본(金資本·49)씨는 사장실에 앉아 콧노래를 불렀다. 아버지가 일으 켜 세운 기업을 물려받은 지 5년이 넘었지만 올해만큼 기분이 좋은 적은 별로 없었다.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다. 안락의자의 편안함이 그를 6년 전 으로 이끌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정말 한편의 영화였어. <대부>를 보는 듯했으니까. 보스인 장로는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부하들은 다음날 새벽 에 특수부대 요원들처럼 날치기작전을 무난히 해치웠지. 작전이름이 아마 ‘민의 탈출’이었지. 기억력이 좀 나쁘고 말 실수를 자주 하는 것만 빼 면 그 사람보다 건강이나 뚝심이 좋은 사람은 없다고 늘 아버지가 말씀하 셨는데…. 어쨌든 그 다음해 1월 내내 총파업에 이은 반정부시위로 시끄 러울 때 버텨준 정부가 참 대견했지. 날치기안기부법도 마침 제구실을 단 단히 했어.”
‘러다이트파’가 기승을 부리고…
혼잣말을 하면서 그는 신문을 펼쳐들었다. 온통 ‘21세기 러다이트파’ 얘기뿐이다. ‘지존파’‘막가파’에 이어 98년 말에 생겨난 것이 바로 ‘러다이트파’였다. 97년 3월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정리해고제 탓에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하나의 거대한 사회세력을 형성했다. 당시 정리해 고의 요건은 무척 모호했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경영의 악화,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조정과 기술혁신, 업종의 전환이 포함됐다. ‘코 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기업 주에게 완벽하게 쥐어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다른 일을 찾았지만, 전직 에 실패한 소수가 사회에 대한 불만을 일탈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면서 이 들은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러다이트파’는 정리해고에 대해 즉자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을 보인 이 들을 부르는 신종 사회용어였다. 이들은 해고의 원인을 제공한 새로운 기 계나 자동화시스템을 직접 부수거나, 자신이 다녔던 은행이나 금융권의 전산망을 파괴하는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했다. 이들은 컴퓨터에 능 한 청소년들을 조직해 국가전산망을 파괴하는 등의 가장 과격한 방식도 선호했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 이들은 이름도 ‘21세기 러다이트파’로 바꾸고 전 국조직을 마련해 좀더 충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했다 . 오늘도 이들은 한건의 사고를 일으켰다. 기업주들이 주로 다니는 전국 주요골프장 25여곳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그건 우리가 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나선다는 점이다.
“경찰은 이런 놈들 확실히 박멸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검찰, 안기부 모 두 나섰는데 아직도 해결을 못하는 거야, 병신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김 사장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똑똑….”“누구야?”
인사부장이었다. 대기업 노무관리를 하다 쫓겨난 사람인데 데려다 쓰니 노동자들 다루는 데는 베테랑이었다.
“사장님, 퇴직금 중간정산제 실시로 회사의 이익이 15억5천만원인 것으 로 계산됐습니다. 또 어제 중앙노동위원회 재심판정에서 이겼습니다. 3개 월 전에 정리해고시킨 5명 모두 조합원 자격이 박탈됐습니다. 참, 이번달 에 노조위원장 재선거를 해야 하는데 나서는 놈이 한놈도 없습니다. 전임 자 임금을 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겁나나 봅니다. 하하….”
“좋아. 나가봐.”
정말 좋았다. 김 사장과 같은 기업주들에게는 97년 날치기노동법이 정말 ‘전가의 보도’와도 같은 보배였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때만 해도 어 림없었지.”
흐물흐물해진 노동조합
그도 그럴 것이 97년 이전까지만 해도 해고자는 대법원에서 정당한 해고 로 확정판결 나기 전까지는 조합원 자격이 인정됐다. 노조활동을 활발히 벌이는 핵심조합원을 잘라도 2년이고 3년이고 질질 끌면서 송사를 진행하 는 데 진력이 난 기업주들이었다. 그러나 보배 같은 노동법은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을 심판하는 곳으로 중앙노동위원회를 못박았다. 기껏해야 2~ 3개월만 마음고생하면 됐다. 퇴직금 정산제는 목돈이 당장 필요한 종업원 을 대상으로 유혹하면 쉽게 넘어가는 점이 기업주들에게는 좋았다. 퇴직 금이라는 게 보통 누진율이 적용되는데 그렇게 되면 돈의 규모가 너무 커 져 기업주들은 싫어했다.
김 사장에게는 올해부터 시작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다른 무엇보 다 맘에 들었다. 조합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효과가 확실했 다. 조합원이 1천명 정도인 김 사장 사업장의 조합비를 계산해보면, 1인 당 조합비를 5천원으로 계산하면 한달에 5백만원 정도가 모이는데, 이 돈 으로 조합을 운영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노조위원장을 포함해 2명 만 전임자로 둔다고 해도 조합비의 반 이상을 전임자 임금으로 쓰고 나면 사실상 조합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은 없어지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문을 닫게 할 수 있는 조항이었다.
전임자로 나서는 이가 없는 이때를 잘 이용해 어용노조를 조직한다는 게 김 사장의 복안이다. 어용노조만 건설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몇년 동안의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노동법은 또 노조에 의하 지 않는 이른바 ‘살쾡이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해놓았으니, 불순세력이 사업장 안으로 들어와도 맥을 못출 게 뻔한 것 아닌가. 단체협약도 1년 만에 하는 게 아니라 2년에 한번씩 해도 되니 금상첨화라고밖에 할 수 없 다.
김 사장을 기쁘게 하는 건 이뿐이 아니다. 한마디로 노조의 힘을 쏙쏙 빼 내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조항들 덕분에 노조가 잠잠해진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고마운 생각이 들 정도다. 쟁의를 해도 대체근로를 할 수 있다 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것도 같은 사업을 하는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 들을 대신 쓸 수 있게 하고 하청을 주는 것도 허용한 건 기업주들의 처지 를 십분 이해한 조처라는 게 김 사장의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하청업체 의 외국인노동자들을 마음껏 쓸 수 있으니 별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계산 이다. 외국인노동자 5%시대에 이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쟁의행위 를 하면 임금을 지급할 수 없도록 한 ‘무노동무임금’원칙을 법으로 못 박은 것도 기업주들로서는 백번 잘한 일이었다.
제3자 개입금지가 그대로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3자개입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노사가 지원을 받기 위해 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한 자’로 못박 아 놨으니 노사가 공동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선정한다는 게 또 얼마나 우 스운 얘기인지. 음식물제조업을 하는 김 사장의 사업장에 적용되는 또다 른 좋은 조항은 ‘생산시설이나 업무에 관련되는 시설에서의 쟁의행위 금 지’와 ‘작업시설의 손상이나 원료·제품의 변질 또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작업의 쟁의행위 금지’조항이다. 더이상 작업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하는 꼴불견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공장에서는 사실상 쟁의가 불가 능해 작업장을 폐쇄하거나 휴업을 할 필요도 없어진 셈이다. 화학공장을 운영하는 김 사장의 친구 한명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김 사장의 아버지도 90년대 중반 한때 외국으로 공장을 옮길 생각을 굳히고 구체적으로 준비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결정적으로 붙잡아둔 건 아마 변형근로시간제의 실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조업체 의 임금은 주로 기본급은 적고 야근과 철야 같은 시간외수당이 많은데, 변형근로시간제는 이 시간외수당을 크게 줄여 기업주들의 부담을 결정적 으로 덜어줬던 것이다.
“파업 꼴불견 안 봐도 된다”
신문에 다시 눈을 돌리니 2004년 베이징올림픽에 한국이 참석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야단들이라고 한다. 국제노동운동조직들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에도 저러더니 국제행사가 있을 때마다 버릇처럼 한국의 참석을 막으려고 한다. 무슨 공무원과 교사의 노조가 없으니 노동후진국이라는 등 내정간 섭적인 발언을 하는 그들을 김 사장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
“남의 나라 노동문제에 무슨 감 나라 콩 나라 지랄들이야. 올림픽은 순 수한 스포츠정신으로 치러지는 행사인데, 정말 이놈들은 스포츠정신도 모 르는 무~식한 놈들이야.”
김 사장의 ‘유토피아’는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디스토피아’인가 보 다.
김창석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