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1월23일 제 142호 한겨레21

여권카드, 파업규모에 달렸다

(사진/기세등등했던 이홍구 대표도 속이 타고 있다. 각계 원로들과 만나 조언을 구하는 것도 그런 위기감의 표현이다. 1월13일 지구당 위원장 연석회의에 참석한 이 대표의 표정이 침울하다.)

지난 연말 노동법과 안기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처리한 뒤 강경노선을 추 구하던 여권이 노동계의 총파업에 직면해 비틀거리고 있다. 불과 며칠 전 만 하더라도 파업주동자 전원 사법처리와 노동법 개정불가 입장을 고수했 던 여권은 ‘대화를 통한 해결’이라는 온건노선쪽으로 급선회한 뒤 민주 노총 및 한국노총과의 텔레비전 토론을 제의하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농성 중인 명동성당을 비롯한 파업현장에 공권력을 무리하게 투입하지 않겠다 고 공언했다.

날치기 처리를 비롯한 일련의 강공책을 총지휘하던 청와대도 물리력에 의 존한 강압적 진압이 사태를 수습불능의 위기국면으로 몰고갈 것이라는 판 단에 따라 다각적인 수습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또 지난 1월8일 새해 들어 처음 열린 당무회의에서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개정안 등 어려운 2개 법안을 처리한 데 대해 대단히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우리 모두 이 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자”고 기세등등했던 이홍구 대표도 사회 각계 원로 급 인사들과 회동을 갖고 조언을 구하는 등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의 지침에 따라 새벽날치기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신한국 당 의원들도 여야 영수회담 개최를 비롯한 수습방안 마련을 지도부에 촉 구하고 있다.


국제사회 악화된 여론도 부담

여권의 이같은 태도변화는 당초 예상과 달리 노동계의 총파업에 대한 국 민적 지지여론이 70∼8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은 데서 비롯된다 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총파업에 대기업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대 거 참여하고 있는 등 기존의 노동쟁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데다 대학 교 수, 성직자, 문인, 언론인 등 사회의 여론주도층이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 정의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성명을 연쇄적으로 발표하는 등 현 정권에 대 한 압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개신교, 불교계를 포함한 종교 계와 지식인 그룹의 적극 참여는 이번 총파업의 성격이 광범위한 민주세 력의 민주화 연대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권의 충격도는 상 상을 뛰어넘는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시위의 전개양상이나 지식인과 성직자들의 시국성명 등을 보면서 87년의 6월 민주화 투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또 지난해 말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한 경제협력기구(OECD)가 한국의 노동 법 개정과정을 심의키로 한 데다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개정된 노동 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국제사회의 악화된 여론도 여권으로서는 부담 스럽지 않을 수 없다. 김 대통령의 취임 이후 찬사를 보냈던 해외의 주요 언론들이 일제히 비난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한 점도 여권의 유화노선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청와대와 신한국당, 안기부 등 여권의 핵심부는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 묘에서 열렸던 집회에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해 ‘김영삼 정권 퇴진’구호를 외친 데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한 관 계자는 “김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으로 여론이 한층 악화된 것 같다”면 서 “상황이 노동법 강행처리 때 상정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게 진행돼 기 존 대책을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당혹감을 표시했다. 지역구 의 원들과 당조직을 통해 민심을 직접 접하는 신한국당의 위기체감지수는 한 층 심각하다. 한 고위 관계자는 “이대로 가면 여당이 도저히 대통령 선 거를 치를 수 없는 파국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진단했다. 청와대와 신한 국당은 전통적으로 불루칼라들의 과격한 노동쟁의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화이트칼라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파업의 ‘주력부대’로 참여하자 더이상 강공책을 밀어붙일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여 권이 김영삼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화이트 칼라들의 반발이 불루칼라들보다 한층 거센 것으로 나타났다. 여권이 가 장 곤혹스러워 하는 대목은 화이트칼라와 지식인들의 집단행동이 노동법 과 안기부법 개정의 날치기 처리 방식과 정리해고제 등과 같은 독소조항 에 반발에서 비롯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김 대통령의 국정운영방식에 대 한 누적된 불신과 불만이 분출되는 양상이다. 집권 말기에 특히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폭발한 화이트칼라들의 분노는 여권 이 우군으로 상정했던 중산층의 여권 이탈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낭패감 은 심각하다. 여권은 지난해 말 날치기 처리를 강행하면서 불루칼라 노동 자와 재야단체의 항의시위가 벌어지더라도 안정희구세력인 중산층의 불안 심리를 자극함으로써 정국을 보수-급진의 대결구도로 몰고갈 수 있다고 계산했으나 중산층인 화이트칼라들의 반란으로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한 마디로 여권은 보혁 구도의 시나리오가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정권 자체 의 존립까지 우려해야 하는 중대한 위기국면에 직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임기말 정국 주도권과 직결

이같은 위기의식에도 아직 여권의 수습안은 “정치적 해결을 모색한다” 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물론 일각에서는 김 대통령과 김대중 , 김종필 총재의 청와대 영수회담 개최, 여야 대화를 통한 노동법의 국회 재개정, 노동관계법의 시행령 유보를 통한 사실상의 시행연기, 최대의 독 소조항으로 불리는 정리해고제의 시행유보 등과 같은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수습방안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사실상 여 권의 굴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구체화 여부는 극히 불투명하다. 여권은 물 론 야권은 여야 대화의 재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지만 그 형식에 대해서 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야권은 청와대 영수회담개최를 요구하지만 여권은 김 대통령이 불과 얼마 전 일축했던 영수회담을 수용할 경우 김 대통령의 체면이 크게 손상될 뿐 만 아니라 영수회담에서 노조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이 마련될 가능 성이 희박하다고 보기 때문에 성사될 가능성은 점치기 어렵다. 야당의 두 김 총재가 청와대 영수회담 직후 결렬을 선언하고 대여 공세를 계속할 경 우 김 대통령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질 것으로 여권 지도부는 판단하고 있 다. 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동계가 요구하는 노동관계법 개정의 백 지화도 현 정부의 무장해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선뜻 수용하기 어렵다. 백지화할 경우 김 대통령은 앞으로 남은 임기를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현여부는 속단하기 힘들다.

여권이 이처럼 구체적인 해법을 둘러싸고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문제가 궁극적으로 여권의 대통령 후보구도와 김 대통령의 임기말 정국 주도권 장악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선 날치기 처리를 총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상급단체 노조허용의 3년유예 결정을 주도했던 이홍구 대표와 정부안 확정과정의 주역인 이수성 총리의 정치적 문책문제 를 둘러싸고 여권은 상당한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여권 관계자들은 노동법 파동이 정치적으로 수습될 경우 이 대표와 이 총리는 도의적 책임 을 지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전망한다. 김 대통령의 정치적 타 격을 최소화시키고 격앙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이-이 체제의 문책 성 교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여권 내부에서는 4∼5월로 예상되던 당 정개편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유 력한 대선주자로 부상했던 이 대표의 퇴장은 여권의 대선후보구도를 이회 창, 박찬종 고문으로 조기에 압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김 대통 령으로서는 달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 등은 여전히 강경진압 주장

여권이 파업사태를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쪽으로 선회했음에도 수습전망 이 불투명한 것은 바로 이같은 사정 때문이다. 또 여권 내부에서는 안기 부 등과 같이 물리적 강경진압을 통한 사태해결을 주장하는 강경세력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여권의 구체적인 해법은 노동계의 총파업 강도와 화 이트칼라 및 여론주도층의 참여규모 등에 의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김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수뇌부는 여전히 가능 하다면 다소의 물의를 감수하더라도 밀어붙여 노조를 완전제압하는 것이 후퇴할 경우의 손실보다 유리하다는 인식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 경우 14일부터 시작되는 한국노총의 시한부 총파업과 15일부터 시작되는 민주 노총의 3단계 총파업의 강도와 규모에 따라 여권의 선택카드가 결정될 것 으로 보인다.

장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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