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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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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치’는 살인을 선택했다

유대인 학살 조력자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판결들… 무심한 톱니바퀴가 아니라 명료한 살해 기제의 능동적 일부로 봐야
등록 2015-08-07 16:12 수정 2020-05-03 04:28

“아우슈비츠는 인간을 살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제였습니다. 그것에 협력한 사람이면 누구나 살해 방조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지난 7월15일 독일 중부 니더작센주 뤼네부르크 지방법원의 재판장 프란츠 콤피슈가 피고 오스카어 그뢰닝에게 4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올해 4월 중순 하노버시의 니더작센주 검찰은 95살의 노인 그뢰닝을 살해방조죄로 기소했다. 3개월의 심리 끝에 검찰은 1944년 5월부터 7월까지 최소한 30만 명 이상의 헝가리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뢰닝에게 3년6개월을 구형했는데, 법원은 거기에 6개월을 더 얹었다.
이 판결로 전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법적 심판은 새로운 역사로 진입했다. 아직 항소 여부가 남아 있고 피고의 건강 상태 때문에 실제 법 집행 여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이 판결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함축한다. 특히 이 판결은 단순히 독일이 일본과 비교해 과거 청산을 모범적으로 잘한다는 인습적 차원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을 지시한다. 폭력 가해자와 가해 조력자에 대한 법적 심판의 기준이 바뀐 것이다.

오스카어 그뢰닝(앞줄 왼쪽 두 번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독일은 기존 기조를 바꿔 학살 범죄의 조력자에게도 법적 책임을 확실히 묻고 있다. REUTERS

오스카어 그뢰닝(앞줄 왼쪽 두 번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독일은 기존 기조를 바꿔 학살 범죄의 조력자에게도 법적 책임을 확실히 묻고 있다. REUTERS

어떤 형태의 협력이든 ‘살인 방조’

“아우슈비츠에서는 협력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콤피슈 판사가 판결문에서 가장 강조한 말이다. 콤피슈 판사는 아우슈비츠에서 실행된 인간 절멸 기제에 어떤 형태로든 협력한 사람은 이미 살인 방조의 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했다. 그럼으로써 이 판결은 그전까지 독일 검찰과 사법부가 나치 범죄의 조력자들, 이른바 ‘작은 나치들’을 법적으로 처리한 방식을 전복했다.

전후 전승국과 독일은 지난 70년 동안 홀로코스트 범죄의 주역이었던 핵심 인물들에 대해서는 법적 심판을 진행했지만, 국가기구의 하급 관료와 직원 및 친위대의 하급 군인들에 대해서는 가해 가담 행위와 관련해서 분명하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면 기소나 처벌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1977년과 1985년 당시 서독 검찰은 두 차례나 이미 그뢰닝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모아 조사했지만 ‘증거 부족’을 들어 기소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런 일은 허다했다. 1945년에서 2005년까지 서방 연합국이나 독일의 사법기관을 통해 나치 범죄로 조사받은 사람은 17만2294명이나 되었지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6656명이었고 5184명은 아예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방면되었다. 유죄판결을 받은 가해자들도 대부분, 즉 약 60%는 1년 이하의 징역형이 선고됐으며, 9% 정도만이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후 연합국과 독일 검찰과 법원의 그런 법 적용은 문제가 있었다. 홀로코스트 범죄의 증인들은 대부분 살해당한 뒤였고, 일부 생존자들도 이른바 ‘육하원칙’에 따라 정확히 가해자와 가해 행위를 증언하기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작은 나치’들은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든지 “체제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했다”며 자기변호에 매진하며 ‘정상 사회’로 복귀했다. 독일 국민도 상당 기간 그 전범재판들을 비판하며 지겨워했다. 196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독일 사회는 민족사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집단적 국민 정체성의 핵심 내용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협력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같은 말을 피고인도 그대로 반복했다. 아울러 그뢰닝은 지난 3개월의 재판 과정에서 “희생자들 앞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며 죄를 인정”한다고 사과했다. 그의 참회와 반성은 재판정에 앉아 있던 사람들 누구에게나 진심으로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는 살해와 직접 관련이 없고 자신은 그저 ‘장부 관리인’으로서 수인들의 돈을 세고 정리해 상부에 보내는 작은 역할만을 수행했다고 변호했다. 친위대 하사였던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살해에 협력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그저 보기만 했다”고 주장했다. 또 그뢰닝은 아우슈비츠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 번이나 전출을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증인으로 출석한 역사가들과 검찰은 그것을 모두 ‘작은 나치들의 전형적인 자기변호’ 방식이라고 맞섰다. ‘홀로코스트가 범죄인 것은 맞지만 나의 행위는 그것과 직접 관련 없다’는 주장으로 그들은 ‘도덕적 죄’를 인정하지만 ‘형사상의 죄’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관들이 보기에 나치 친위대 군인으로서 홀로코스트에 적극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사상의 죄’를 부인하면서 단지 ‘도덕적 죄’를 시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말한 형사상의 죄와 도덕적 죄의 구분을 오해하고 악용하는 예였다.

“저는 당신을 겁쟁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 스스로 책상에서의 일을 결정했습니다. 아우슈비츠 근무는 당신의 결정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강제적인 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재판장 콤피슈는 그뢰닝의 자기변호를 직접 겨냥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 포로들. REUTERS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 포로들. REUTERS

작은 나치들의 전형적인 자기변호

콤피슈 재판장이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의 역사 연구를 통해 나치 지배와 학살 기구의 하급 군인과 직원들이 도처에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일정한 선택권을 갖고 있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뢰닝이 전출을 요청한 증거는 없었으며 심지어 그런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1944년 여름의 그 ‘헝가리 작전’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해 학살에 기여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재판은 이미 2011년 존 데먀누크 재판과 2013년 한스 립시스 재판의 연장이었다. 2011년 5월12일 92살의 데먀누크는 뮌헨 지방법원 법정에서 2만8060명에 대한 살인 공조의 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징역형은 집행되지 못했고 그 다음날 그는 18개월 동안의 수감 생활과 법정 싸움을 뒤로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2012년 5월 끝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채 독일의 한 요양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울러 데먀누크보다 한 살 많았던 립시스도 데먀누크와 마찬가지로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다만 립시스가 치매 상태였기에 더 이상의 사법 처리가 불가능해 방면되었다. 둘은 각기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 출신의 친위대 하급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강제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법적 논쟁이 좀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직위와 역할로 보건대 나치 친위대 조직에 자발적으로 지원했고 살해 기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것이라는 혐의를 벗지 못했다.

최근 4년 동안 이 연이은 홀로코스트 재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유죄판결의 관건이 이제 더 이상 학살 기구에서의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정 직위와 역할이 어떤 형태로든 그 학살 기제의 작동에 도움이 되었다면 모두가 홀로코스트의 범죄자로 확정되었다. 다시 말해, 개별 행위자들의 구체적 범죄행위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하더라도 역사학적 연구에 기초해 특정 직위와 역할이 그 범죄에 가담하고 협력했음이 추정될 때에는 유죄판결이 가능해진 것이다. 살해 도구를 빌려주거나 망을 봐준 사람이면 그도 또한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진 셈이다.

능동적·주체적이었던 가해자들

이렇게 ‘작은 나치들’에 대한 법적 심판을 가능하게 한 것은 폭력 ‘가해자 연구’라는 분과 학문이 지난 20년 동안 축적한 연구의 결과다. 오랫동안 학계를 지배했던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식은 최근 연구들로 인해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근대 문명 내지 억압적 근대국가가 이질적인 세력을 조사하고 감시해 명령과 복종에 의거하는 관료제를 수단으로 삼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인식이 지배했다. 이른바 대량 살해의 산업적 기제 내지 기술 문명의 내재적 파괴성 또는 근대의 익명적 관료제에 대한 논의가 산더미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의 그와 같은 제한적 인식에 따르면, 수용소를 운용하고 관리하며 대량 살해에 가담한 대다수 나치의 중·하급 관리들과 친위대원들은 국가 체제의 관료제적 운용을 통해 직접 수인들을 접하지 않고도 책상 앞이나 서류상의 일을 통해, 특히 분업 체계 속에서 자신들의 의무만 이행하면 되었다는 것이다. 익명적 관료 체제나 근대적 분업 체계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부담을 덜고 직접 책임 의식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근대성의 필연적 발전이니 근대 기술 문명의 역설이니 하는 설명들이 뭔가 근본적인 성찰인 양 뒤따랐다.

물론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문명 파괴와 인명 살상의 기제 앞에서 그런 정적인 관찰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왜 특정 국면에서 특정 행위자들이 과도한 파괴와 살상을 감행하는지가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다. 행위 과정의 역동성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89~90년 유럽 냉전이 종식돼 서방국가의 역사가들에게도 동유럽과 소련의 문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울러 그곳 노인 세대에 대한 생애사 연구 프로젝트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사료 탐구와 구술사 작업을 통해 동유럽 국가들과 옛 소련 지역에서 전쟁 기간 발생한 독일 나치 군인과 기관들의 학살 과정을 살펴본 역사가들은 동유럽 지역의 홀로코스트는 서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대면 학살’이 빈번했고,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이들이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킬링필드’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새로운 가해자 연구’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동유럽에서 나치 군인과 관리들은 위로부터 명령을 받을 겨를이나 필요가 없어 도처에서 자율적 행위를 일삼았고 그 행위 ‘과정’을 통해 스스로 더욱 과격해지며 파괴적으로 학살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근대 관료제적 규율과 명령의 계통을 넘어서니 더욱 파괴적이었고 경계를 뛰어넘는 폭력의 증폭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 상당수 희생자들은 가스실이 아니라 작업장 또는 들판과 산속에서 총살당했는데, 많은 경우 가해자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살인자 내지 살인 방조자였다.

아울러 수용소나 ‘킬링필드’에서 폭력과 학살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군인들에게 따로 심각한 불이익이 발생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만큼 나치 친위대 군인들과 관리들은 스스로의 삶의 방식과 타인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적이나마- 누렸고 오히려 문제는 그것을 악용해 스스로 역동적 파괴의 주체로 발전해갔다는 사실이다.

이런 ‘새로운 가해자 연구’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가해자들이 단순히 과격한 이데올로기나 개인적 이익과 출세라는 동기 외에도 주로 집단적 결속감의 과시와 동료애의 실천 같은 상호작용과 사회화를 통해 더욱 능동적이고 파괴적으로 폭력을 사용하고 살해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사법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의 가해와 피해가 법정에서 공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기소와 판결이 쉽지 않은 경우, 협애한 사법적 근거로 역사적 진실을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4년 동안 ‘작은 나치들’에 대한 독일의 법적 심판은 ‘새로운 가해자 연구’에 기반을 둔 역사적 진실에 의거해 법적 판결의 기준을 뒤집었다. 역사 연구의 성과에 기초해 검찰과 사법부는 ‘역사 정의’를 세우는 데 참여했다.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오랫동안 가해(조력)자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던 자신들의 과거조차 법정에 세워 자기비판을 수행했다.

왜 여전히 가해 집단은 생겨나는가

독일도 여기까지 오는 데 꽤 오래 걸렸다. 이제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정치 폭력의 가해자들이 계속 집단적으로 형성되는지를 더 살피는 일이다. 근대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도, 문명적 틀을 박차고 나간 야만도 횡포하긴 마찬가지였다. 또 기괴한 이데올로기의 맹신이나 음험한 사적 이익 말고 특별한 종류의 집단적 결속과 동료애 문화도 모두 폭력 발진의 가속기였다는 사실이 독일의 ‘작은 나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폭력 가해자나 가해 조력자로 형성되는 과정과 배경이 단선적이지 않고 저렇게 ‘오만 가지’라면, 우리는 그 ‘오만 가지’ 길 모두에 장벽과 제어 장치를 만들면서 살아야 한다. 역사를 위해서라면, 우리 모두 오래 살아야겠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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