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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동안 무소유? 전쟁같고 천국같은 기적의 공동체

‘야마기시즘’ 한국 실현지 화성 산안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내가 옳다’는 생각을 소유하지 않는 데 집중”
등록 2024-04-26 11:56 수정 2024-05-07 03:02
산안마을의 젊은 세대, 김한결(왼쪽 셋째)씨와 이경묵(넷째)씨가 마을을 설명하고 있다. 이유진 기자

산안마을의 젊은 세대, 김한결(왼쪽 셋째)씨와 이경묵(넷째)씨가 마을을 설명하고 있다. 이유진 기자


사람들은 반가워서 어쩔 줄 몰랐다. 머리에 새하얗게 서리가 내린 50~60대 어른들이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하나도 안 늙었네!”

2024년 4월20일, 경기 화성시 향남읍 구문천리 산안마을에서 ‘야마기시즘 실현지’ 설립 40돌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38년 만에 다시 만난 사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18년을 살았고 누군가는 9년, 7년 또는 아주 잠시 거쳐갔다. 강화에서 제주까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떠들썩했고 근처 양계장 닭들은 꼬꼬댁 홰를 치며 난리법석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쌀쌀했다. 따뜻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을 먹으니 대가족 잔치가 따로 없었다.

2024년 4월20일 밤 10시를 넘겨 연찬회가 끝났다. 사람들이 “야마기시!”라고 외치며 웃고 있다. 이유진 기자

2024년 4월20일 밤 10시를 넘겨 연찬회가 끝났다. 사람들이 “야마기시!”라고 외치며 웃고 있다. 이유진 기자


강화, 제주… 전국에서 모여들어 떠들썩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이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세계를 간파했다. 비인간, 유기체,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연결돼 살아가는 ‘실뜨기의 세계’를 말했다. 그것은 다정한 세계라기보다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길 수밖에 없는 냉혹한 세계이기도 하다. 이론물리학 박사이자 해러웨이 연구자인 최유미씨는 비인간 타자들과 연결되는 해러웨이의 사상(‘심포이에시스’)을 ‘공-산’이라 번역했다. 함께 만드는 공동체.

야마기시즘 실현지라고 하면 이런 ‘공-산’, 실뜨기의 세계가 떠오른다. ‘무소유·공용·일체’라는 사상 아래 진실하고 행복한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야마기시즘의 정신이다. 야마기시즘 실현지는 1950년대 일본의 농촌운동가 야마기시 미요조(1901~1961)가 제창한 ‘야마기시즘’을 현실에 구현한 공동체다. 한국을 포함해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스위스, 타이, 브라질 등에 실현지가 있다. 한국의 화성 실현지는 올해로 설립 40년이 됐다. 한국어 표현으로 이 공동체는 ‘산안마을’(야마기시, 山岸)이라 일컫는다. 현재 구성원과 체험자를 포함해 16명이 살아간다.

‘무소유’ 마을이 생겨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의구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성직자도 자기 재산이 있고, 무소유를 부르짖는 스님들도 제 밥그릇이 있거늘 어떻게 사유재산 일체를 버리고 필요에 따라 물건이나 공간을 공유하는 삶이 가능한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공동체 일정에 나의 삶을 따르며 나이와 무관하게 서로 ‘씨’라고 부르면서 평등하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연찬’(硏鑽·연구해 뚫는다는 뜻)을 매일 하는 생활이 가능한가?

2021년 완공한 산안마을 공동체 주택. 각 세대에 따라 조금씩 모양이 다르다. 이유진 기자

2021년 완공한 산안마을 공동체 주택. 각 세대에 따라 조금씩 모양이 다르다. 이유진 기자


마을에 도착하자 뾰족지붕을 한 세련된 주거동이 보였다. 유럽의 영성 공동체나 피정 센터 같은 단정함과 우아한 아름다움이 엿보였다. 2021년 완공된 8채의 공동체 주택 중 1동은 마을 공동 사랑방으로 쓰는 커뮤니티 센터이고 나머지 집은 각 세대원이 산다. 마을 사람들은 무소유 원칙에 따라 가전제품, 부엌이나 거실 같은 생활공간, 자동차를 공유한다. 예전엔 옷가지도 공유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마을 사람 김한결(37)씨는 “요즘은 ‘물질적 무소유’에 집중하기보다 각자 생각이 옳다는 생각을 소유하지 않는 데 집중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전과 달리 종교생활을 하거나 개인적인 물건을 구입하거나, 개인적인 시간도 보냅니다. 우리는 사이좋은 즐거운 생활이 목표고, 소유하고 싶은 생각을 억누르기보다 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내놓고 검토하는 게 더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모든 구성원이 한 건물에서 살았기에 그들이 키우는 닭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산다는 얘기도 들었다. 각 세대를 가로지르는 판자벽 하나 정도 있을 뿐이어서 옆방에서 하는 이야기 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젊은 세대는 변화해야 한다고 느꼈고, 아이들을 좀더 쾌적한 환경에서 키우기 위해 주거환경 개선 사업을 하기로 했다. 새 공동체 주택은 법인 소유 건물이며 세법상으로는 사원용 주택이다.

경제활동의 중심은 양계다. 총 21개 동 계사 가운데 16개 동에서 4만 마리 닭이 하루 2만5천 개의 알을 낳는다. 생협 매장, 택배 판매, 그리고 화성시 소매점에서 달걀이 소비자와 만난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지만 계사 안에는 불쾌한 냄새가 거의 없었다. 산안마을 3세대인 이경묵(34)씨는 “산업적으로는 양계가 매력적이다. 물류도 잘돼 있고, 일도 더 잘할 수 있다. 생계와 삶을 한 공동체에서 한다는 것이 어렵고 스위스 사람인 아내도 공동체 바깥에서 취업할 예정이지만 (공동체에서 함께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산안마을의 큰아빠’로 불리는 윤성열씨와 특강 참석자가 마을 어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유진 기자

‘산안마을의 큰아빠’로 불리는 윤성열씨와 특강 참석자가 마을 어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유진 기자


산안마을 형성은 한국 농업 발전사와 궤를 함께한다. 한때 이 공동체는 ‘한국의 키부츠’로 일컬어졌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농촌운동에 투신한 이건우(1932~2001)가 협업농장을 만들려고 고향인 화성군으로 내려왔다. 1961년 봄 조한규(1935~ ), 김병규(1938~1985)가 결합해 화남협업농장을 설립했다. 부농의 아들이었던 김병규는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농촌운동에 뛰어들었다. 대농가에서 자라난 조한규는 청년 농부로 일찌감치 화성지역 농업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세 사람은 결혼 뒤 협업이 와해될 것을 우려해 각자의 여동생과 부부가 되어 합동결혼식을 올렸을 정도로 강고한 ‘동지’였다. 조한규의 동생으로 김병규와 결혼한 조정희(86)씨는 아직까지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조씨는 “(앞으로도 공동체에) 지속적인 이어짐이 있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1961년 일본 가스가야마에 자연농법을 실시하는 무소유 공동체가 처음 생겼다. 윤세식, 조한규 등은 1965년 ‘선진지 견학’차 일본 산안회 농장을 방문했는데 한국 정부도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비자를 연장해가며 공동체 정신과 양계법을 배운 뒤 1965년 1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1월부터 야마기시즘의 이론과 정신을 전수하는 ‘특강’을 시작했고 전국 농촌운동가에게 야마기시즘을 소개했다. 무소유의 삶, 자연친화적 순환농법,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평등한 연찬회를 통한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야마기시즘의 핵심 활동이다. 농업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뿐 아니라 스님, 명상가 등도 야마기시 특강을 받았다.

2000년 7월 연찬회. 처음 자기 주장을 펼치던 사람들은 연찬회가 무르익으면서 점점 의견을 수렴해 간다. 이남곡(맨 왼쪽), 김현주(왼쪽 둘째)씨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7월 연찬회. 처음 자기 주장을 펼치던 사람들은 연찬회가 무르익으면서 점점 의견을 수렴해 간다. 이남곡(맨 왼쪽), 김현주(왼쪽 둘째)씨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실현지의 큰아빠’로 불리는 윤성열(81)씨는 만 22살 때 2회 특강에 참여했다. 그는 일본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1세대 중 한 명인 윤세식씨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귀국 직후 암 투병으로 병상에 눕자 윤성열씨는 공동체에 투신한다. 그는 “종달새가 먼 하늘에서 나를 불러들이는 느낌이 있었다”고 말했다. 1984년, 6가구가 화성시 향남읍 구문천리에 정착했다.

“지금 이 바닥에 깔린 콘크리트 하나하나 우리 손으로 다졌어요. 그때는 무소유, 공용, 일체사회 실현의 꿈이 있었죠. 재산도 없고, 못 먹고 살면 깡통을 차고 빌어먹더라도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어요. 철저하게 서로 마음을 모으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사이가 좋아야 마음도 몸도 합해졌을 때 전진할 수 있어요.”(윤성열)

2000년 초 마을 입구에 서 있던 간판.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초 마을 입구에 서 있던 간판. 한겨레 자료사진


공유·순환농법·민주적 의사결정이 핵심

야마기시 미요조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사회의 모습을 상생의 원리에서 찾았고 이를 닭 사육에도 적용했다. 그가 기른 닭은 1940년대 일본의 극심한 홍수 피해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의 방법을 이어받은 산안마을 농장의 닭들은 넓은 평사식 계사에서 자란다. 바닥은 풀, 볏짚, 왕겨, 톱밥, 흙, 굴 껍데기 등이 미생물에 발효돼 악취가 없다. 계사는 햇볕이 잘 들고 공기 순환이 원활하다. 동물복지 기준으로도 바닥 면적 1㎡당 닭을 9마리까지 키울 수 있지만, 이곳에선 1㎡당 4.4마리가 생활한다. 태양, 공기, 흙, 물이 상호작용하며 상호 번영한다는 대원칙의 야마기시즘 농법으로 만든 유정란은 좋은 품질로 유명하다. 40년 동안 닭들은 한 번도 조류독감(AI)에 걸리지 않았다.

 

야마기시즘 실현지 ‘산안마을’ 양계장의 닭들. 1㎡ 공간에 평균 4.4마리가 살아간다. 이유진 기자

야마기시즘 실현지 ‘산안마을’ 양계장의 닭들. 1㎡ 공간에 평균 4.4마리가 살아간다. 이유진 기자


2021년 공동체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12월23일 산안마을에서 1.8㎞ 떨어진 산란계 농가에서 고병원성 조류독감이 발생했다. 행정당국은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라 발생농가 인근 3㎞ 이내 농가 닭들도 예방적 살처분을 해야 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산안마을 닭들은 음성이었다. 예방적 살처분은 구태의 방역 관습일 뿐, 운송수단이 발달한 21세기엔 주변 농장만 더 위험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명령에 거부했고 두 달을 버텼다. 화성시청, 세종시, 청와대, 국회로 다니면서 이 명령이 왜 비과학적인지 설명했다. 30대 마을 사람 4명이 밤낮으로 외국 자료를 뒤져서 공부했다.

김현주(61)씨는 “대립투쟁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을의 원칙이었고, 대립을 접는 방식도 우리에게 맞게 하자고 결정했다”고 했다. 야마기시적 삶의 태도는 대립보다 호혜와 평등에 바탕을 뒀다. “거듭 연찬을 열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건강한 상태’로 싸울 수 있는 마지노선을 기다렸다가 명령 거부를 접었죠.”

2021년 2월19일, 결국 산안마을은 방역 당국의 예방적 살처분 명령을 받아들였다. 3만7천 마리가 인도적 안락사 형식으로 질소가스를 이용해 살처분됐다. 130만 개의 달걀도 폐기됐다. 2년여에 걸쳐 완비해둔 자체 방역시스템은 쓸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김씨는 “공동체의 가장 큰 위기였지만 전국에서 진짜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았다. 시민단체, 동물단체, 시민 등. 연대 서명을 해준 이는 셀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3㎞ 농가 예방적 살처분 거리는 500m로 줄었다. 지금처럼 생산량을 회복하고 거래처를 확보하는 데 꼬박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2021년 2월 산안마을 살처분 당시 모습. 산안마을 제공

2021년 2월 산안마을 살처분 당시 모습. 산안마을 제공


변화 실험기… 세대 재생산이 숙제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는 특별강습연찬회(특강)가 열린다. 7박8일 동안 공동체에서 합숙하며 자기 자신과 사회, 자연의 이치를 깨닫도록 이끈다. 일생 동안 딱 한 번만 참가할 수 있다. ‘나의 판단이 절대적인 것인가’ ‘‘정말의 나’는 어떨까’ 등을 숙고하며 상대의 말을 듣고 검토하는 법을 익히는데, 특강을 받은 뒤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사람들이 많다. “30년 화두를 잡았는데 이번에 깨쳤다”는 스님도 있었다.

참가자들은 1990년대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 이후 대안을 찾아 온 사람이 다수였다. 당시 공동체를 대표하는 문장은 ‘누더기와 맹물로 거저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오라’였고, 이 말에 감동받은 사람이 적잖았다. 자기 재산을 털어 넣어 식구가 되는 ‘참획’을 거친 사람들이 2000년대 초 50~60명으로 최대였다. 이후 점점 불편한 생활환경, 이상과 현실의 괴리 같은 문제로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산안마을에서 태어나 자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사는 김한결씨가 계사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유진 기자

산안마을에서 태어나 자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사는 김한결씨가 계사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유진 기자


지금은 성인 7쌍의 부부와 그 가족, 어린이 2명 등이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산안마을은 유기농 농업, 생협운동의 효시이자 상징이 됐고 화성시 안에서도 인정받는 농민 공동체가 됐다. 김현주씨는 “이제는 이름이 야마기시즘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젊은 사람들이 살 수 있고 함께 모여서 생각을 나누는 ‘연찬’만 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말했다. 무소유, 무아집, 자유를 추구하는 삶의 지향만은 놓칠 수 없어 야마기시즘 영농법인 정관에 ‘무소유’라는 개념이 실현될 수 있도록 명시했다.

젊은이들은 다른 나라의 실현지에 가서 생활하고 짝을 찾기도 한다. 김현주씨의 며느리 국적은 스위스이고 딸은 일본 가스가야마 실현지에 두 달 동안 가 있다. 세대가 바뀌면서 공동체도 실험기에 들어갔다. 사회와 공동체 사이의 공고한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볼 수도 있고, “지금이 변화의 골든 타임”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건 세대 재생산이다.

1세대 김병규-조정희씨의 딸로 거의 평생 이곳에서 살아온 김현주씨는 “그동안 스펙터클해서 재미있었다. 온 세계가 나한테 왔다 간 느낌”이라고 했다. “운동성과 현실을 조화해낸다는 게 심리적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개인이 중시되는 흐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며 웃었다. 대학 때 학생운동으로 오랫동안 수배를 받고 1년간 수감 생활했던 ‘철의 전사’ 김현주씨는 요즘 정원을 가꾼다.

“기후위기, 환경위기가 있는데 꽃나무 심는 게 가장 손쉽고 급진적인 일 같아요. 중요한 건 유연한 사고, 그리고 연찬이에요.”

유토피아를 가슴에 품은 사람들
2024년 4월20일 오후 7시부터 시작한 연찬회.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씩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유진 기자

2024년 4월20일 오후 7시부터 시작한 연찬회.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씩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유진 기자


저녁이 되자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연찬’이 열렸다. 사람들이 커다란 방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야마기시즘 삶의 태도가 바로 이 의례에서 비롯한다. 연찬이란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실천한다는 뜻을 담았다. 이날 연찬의 주제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였다.

“저는 1986년 12월 고3 때 특강 받은 사람입니다.” “희망에, 이상사회에 대한 꿈, 이게 그때의 나였어요. 지금은 여기 있네요.” “38년간 여기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지금도 실현지를 생각하면 스마일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주부로서 정말 유기농 생산인지 확인하러 왔다가 특강을 받았어요.” “참획을 하고 내 옷장, 내 옷만 보이더니 어느 순간 이 안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더라고요.” 많은 사람이 실현지의 가치와 이념을 좇아 이곳으로 왔노라 밝혔다. 김현주씨의 아들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경묵씨는 “어렸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뜨거웠던 이상사회의 열망과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외형은 줄었을지 모르지만 그때 뿌린 씨앗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 자리에 함께한 수십 명의 사람들 누구 하나 배제되지 않고 모두가 한마디씩 보탰다.

연찬회 주제를 붙이고 있다. 이날의 주제는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였다. 이유진 기자

연찬회 주제를 붙이고 있다. 이날의 주제는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였다. 이유진 기자


강화에서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또 다른 실천을 도모하며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는 유상용(60)씨는 “부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1992년 28살의 나이에 찾아가 2009년까지 17년을 살았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살아 있고, 여전히 지속된다. 고갱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문운동가인 연찬문화연구소 이남곡(80) 소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어려운 세상이다. 나라 안팎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그럴수록 유토피아를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엄청난 것이다. 여든인 지금 나도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고 혁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2세대 청년 농부 김한결씨는 말했다. “여기에서 태어나고 대부분의 삶이 여기서 본 세상입니다. 앞으로도 잘해나가고 싶습니다.”

김현주씨는 “(이 공동체에서)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크게 웃었다. 무소유, 평화, 평등 공동체의 40년은 전쟁터 같기도, 천국 같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산안마을에서 생산한 유정란. 산안마을 누리집

산안마을에서 생산한 유정란. 산안마을 누리집


야마기시즘 실현지 표지판. 양계를 주로 하는 마을의 상징인 닭과 병아리가 그려져 있다. 이유진 기자

야마기시즘 실현지 표지판. 양계를 주로 하는 마을의 상징인 닭과 병아리가 그려져 있다. 이유진 기자


윤성열(맨 왼쪽)씨는 만 22살 때 2회 특강에 참여했다. 그는 일본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1세대 중 한 명인 윤세식씨의 아들이다. 야마기시 실현지의 씨앗을 뿌린 조한규의 동생으로, 김병규와 결혼한 조정희(가운데), 김병규-조정희 부부의 딸 김현주씨. 이유진 기자

윤성열(맨 왼쪽)씨는 만 22살 때 2회 특강에 참여했다. 그는 일본 야마기시즘 실현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1세대 중 한 명인 윤세식씨의 아들이다. 야마기시 실현지의 씨앗을 뿌린 조한규의 동생으로, 김병규와 결혼한 조정희(가운데), 김병규-조정희 부부의 딸 김현주씨.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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