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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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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가들의 운동가, 좌파들의 좌파

대담집 <홍세화의 공부> 함께 쓴 천정환 교수가 본 홍세화 선생… 계몽과 이성의 힘 신뢰한, 가르치지 않지만 늘 가르친 ‘인간-고전’
등록 2024-04-20 04:01 수정 2024-04-24 00:30
홍세화 선생이 2024년 4월18일 별세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지인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홍세화 선생이 2024년 4월18일 별세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지인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을 모르겠다. 표상된 인생의 모든 것, 수천 편의 글과 그림, 간접 경험된 모든 것과 직접 늙으며 몸으로 겪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않나. 턱도 없지 않나. 겪으면서 자꾸 당혹해 한다. 늙어가는 모든 것은 진심으로 새롭다. 어떤 때는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십 대가 이십 대가 되고, 스물이 서른 되고, 사십 되는 길은 전혀 이런 게 아니다. 나이 든 사람이 하나둘 스러져 갈 때도 그렇다. 허무는 당연한 것이고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어중간하게 늙어서 그런가 모르겠다.

입 밖에 나온 말은 지키려 하는 사람

오히려 젊은 죽음은 명료한 생각과 감정을 부른다. 그런 죽음을 초래한 잘못된 사회, 잘못된 종교, 잘못된 국가, 잘못된 어른, 잘못된 전쟁, 잘못된 절망 같은 것…. 그런 죽음들 앞에서 뜨거운 분노와 생의 새삼스러운 아름다움에 대한 생생한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남은 자의 고통과 죄의식에 이입한다. 아프지만 명료하다. 그래서 나는 자살에 관한 책(<자살론>, <숭배 애도 적대>)을 쓸 수 있었다.

늙은이는 다르다. 한평생, 인생 전체, 긴긴 시간, 다단한 관계, 겪어낸 굽이굽이, 공과, 선악, 부침, 성패, 책임과 무책임, 죄와 회개. 그 역설이나 뒤죽박죽을 재기도 힘들고, 도무지 알 수도 없다. 당사자조차 그럴지 모른다.

그리하여 늙은 죽음 앞에선 도무지 얼마만큼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지, 아니 춤추거나 박수를 쳐줘야 할지, 거참 시원섭섭합니다, 말해야 하는 건지 영 모르겠다.

‘기대수명’보다 오래 늙다 죽은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가 하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런 조사를 들으면 어색하고 심지어 때로 맹랑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물론 나 자신도 할 말이 없어 늘 그렇게 인사치레해버리고 말지만, 진위를 알 수도 없고, 효용도 모르는, 반푼 값어치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차라리 남은 유족을 위해 내는 부조금이 진실하고 삶의 본질에 가깝겠다.

그런데 늙은이 중에도 간혹 젊은이같이 살다 가는 인간, 그러니까 굽이굽이 늙어, 주름도 굽이굽이, 그 속에 간지도 뻔뻔함도 꽉 찬 그런 인간이 아니라, 일관되게 산 사람, 제 입에서 나오는 말 때문에 진심을 다해 고민하고 또 궁굴려 생각하고, 입 밖에 나온 말을 굳이 지키려 하는 사람이 좀 있다.

나는 왠지 홍세화가 좀 젊다. 그래서 ‘선생님’이라든가 기타 한국어 존대법 같은 건 치우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굳이 말하면 먼 삼촌이나 스승 비슷한 사람이고, 아니 그보다는 좀 덜 살갑고 약간 어려운 나이 많은 선배 같다. 이것은 나의 그에 대한 또 하나의 ‘리스펙’이다.

‘세화’는 무정부주의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세계평화’(世界平和)의 줄임말이다. 그 아버지는 1947년 만신창이가 돼가던 조선에서 어떤 무정부주의자였길래, 그 태어난 아기는 어땠길래, 붙인 이름이 그리 세련되고, 주인의 운명까지 넘나 봤을까?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자로 살고 ‘르몽드’(Le monde·세계)와 일하게 될지 어떻게 알았을까?

나이·경력·권위 내세우지 않고 학연·지연에서 자유로워

<홍세화의 공부>(2017)라는 대담집을 내면서 홍세화의 인생과 인품, 그리고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전사’로부터 진보신당 대표에까지 이른 실천활동에 대해 알게 됐다. 책 제목에 ‘홍세화’와 재미없는 단어 ‘공부’를 붙인 것은, 홍세화가 진심으로 말과 교육의 힘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그래야 세상이 나아진다고 믿는, 한마디로 ‘계몽과 이성’의 힘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몽과 이성’에 대한 내 딴지에도 이런 생각을 양보 없이 줄곧 말했다. 그래서 책 제목은 합당했다. 그러니 그는, 말하자면 ‘인간-고전(Classic)’이다. ‘대안 사실’ 이전, 뉴미디어와 유튜브 이전, 즉 이명박과 트럼프 따위 이전의 ‘휴먼’이라는 것이다.

또 그래서 그는 운동가들의 운동가, 먹물들의 먹물, 교사들의 교사, 좌파들의 좌파 같은 사람이었다. 70이 넘어서도 언제나 읽고 쓰고 번역하고, 젊은 사람들과 토론했다. 아니, 그냥 자연스럽게 묻고 답했다. 가르치되 가르치지 않았다고 할까. 반대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늘 가르쳤다고 할까. 2022년 코로나19 때 인권연대에서 한 강좌에도 청중으로 왔다. 나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라 당혹했지만 곧 자연스러워졌다. 그는 그런 능력을 가진 이였다.

<공부>의 첫머리에서도 나는 썼다. 홍세화가 나이, 경력,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학연, 지연 같은 데서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점을. 그런 게 그때도 이 사회에서는 특별하고도 큰 덕목처럼 느껴졌다.

홍세화 선생은 언제나 읽고 쓰고 번역하고, 젊은 사람들과 토론했다. 홍세화 선생이 2011년 4월5일 <한겨레21> 창간 17돌 기념 인터뷰 특강에서 ‘유배된 청춘’이라는 주제로 강의하는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홍세화 선생은 언제나 읽고 쓰고 번역하고, 젊은 사람들과 토론했다. 홍세화 선생이 2011년 4월5일 <한겨레21> 창간 17돌 기념 인터뷰 특강에서 ‘유배된 청춘’이라는 주제로 강의하는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아마 시건방진 소리겠지만, (그리고 이제 50이 넘어 뭔가 좀 변했지만) 보고 따라 배울 만한 소위 ‘어른’이나 선배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작은 나라는 너무나 정치적 변동이 잦고, 강대국 패권싸움에 인민의 목숨과 운명이 풀처럼 쉬 짓눌려버리고, 따라서 당장 돈 되는 일이나 기회주의와 생존주의가 진리인 양 여겨지는, 그런 나라에서 ‘제정신’과 ‘제 모습’을, 일관성을 유지하는 인간은 드물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고 말은 하지만, 언제나 또 스스로도 그 반대로 살고 또 그런 삶을 견딘다.

상황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세

홍세화는 실로 많은 걸 몸소 보여주며 가르쳤지만, 마지막 길도 그랬던 거 같다. 그는 암 선고를 받은 지 일 년 몇 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치명적인 병이었나.

두 달 전 설날 때 경기 고양시 일산의 집 근처에 가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사실 놀랐다. 많이 쇠약해져서 발걸음과 말이 모두 느려졌고 목소리에서 기가 빠졌다. 잘 웃는 그 웃음이 엷어졌고 식사도 조금밖에 못했다. 그전에는 늘 덩치 큰 나보다 잘 드셨으면 드셨지 못 드시지 않았다. 홍세화가 밥을 반밖에 안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을 때, 섭섭했고 슬펐다.

그는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았다 한다. ‘항암’도, 물론 ‘연명치료’도 말이다. 그도 ‘휴먼’이어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어쩔 수 없었지만 또 일관된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한 살이라도, 한 달이라도 더 젊어 세상을 뜨기를 원했던 게 아닌가? 물론 나만의 짐작이자 상상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것은 참 아쉽다. 암과 쇠약과, ‘죽음의 예감’에 대해 홍세화의 언어로 홍세화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호기로운 젊은이처럼 ‘그래도 담배는 안 끊겠노라’ 웃으며 말하는 것에도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지만.

그는 <공부> 때 “상황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세와 그에 따른 ‘투신’의 인생 경로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그 소재는 남민전과 진보신당이었다. 그건 분명 참으로 젊은 거 아닌가. 그는 자기 한계를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용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홍세화: 앞에 나서고 리더가 되고 하는 그릇이 못 되는 사람인데 유신이 선포되고 앞에서 운동하던 학생들이 거의 다 끌려가서 대학가는 그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그냥 죽어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였어요. 정말 견디기 어려웠죠. 군대 갔다 온 뒤였는데 제 고교 동창인 박석률씨한테 아주 자연스럽고 너무나 당연하게 설득됐어요.

하루는 남민전 깃발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게 인혁당 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이 남긴 수의로 만든 거였어요. 결국 남민전에 가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다가 잡히면…’ 이런 생각을 왜 안 했겠어요? 당연히 했죠. 하지만 ‘그래도 해야 된다’는 생각에 더 끌렸던 거죠. 그런데 그것도 저는 ‘용기’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질문자: ‘용기’가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되나요?

홍세화: 글쎄요. 그냥 ‘상황의 부름에 응답했다’는 정도의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진보신당 대표로 나갈 때도 그런 감흥이었어요. 전혀 깜냥도 안 되고 뭐 정치적인 자질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 응답의 차원에서 대표직까지 맡게 되었죠.

질문자: 작은 당이라고는 해도, 주로 글과 말로 살고 싸우는 지식인이 정당의 대표를 맡는 일은 흔하지는 않죠. 지식인이라는 사람은 정치인과는 체질 자체가 다르지 않나요? 그들은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인 척하지만 훨씬 관념적이며, 말과 생각은 성하지만 몸이 굼뜨지요. 게다가 흔히 수줍고 소심하며 약하지요. (…) 그래서 항상 궁금했습니다. 상황의 부름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마련돼야 하잖아요? 2008년 총선에서는 비례대표 출마를 주변에서 많이 권고했는데 그때는 사양했고 또 가족들도 만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11년에는 어떻게 당대표에 출마하셨습니까?

홍세화: 2008년에는 진보신당 안에 그래도 사람들이 있었어요. 또 그 기운이란 게 소멸될 그런 게 아니었죠. 그러다가 당에서 핵심적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게 2011년 상황이었어요. 그때도 일종의 자존심과 오기 같은 게 작동했어요. 한국 사회에서 진보신당 당원이 된다는 것이 갖는 역사적 과정이 있었고 또 그런 개인들이 지닌 의미가 그렇게 경시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홍세화·천정환, <홍세화의 공부> 중에서)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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