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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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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자 청소년’이 선택한 집

학교와 집을 나와 적극적인 이주자의 삶을 선택해온 예술실천활동가 박김예림
등록 2022-02-09 07:35 수정 2022-02-11 02:14
예술실천활동가 박김예림. 박재호 제공

예술실천활동가 박김예림. 박재호 제공

대부분의 이주는 집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박김예림(26)의 이주는 남들보다 이른 18살 때 시작됐다. 당시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탈학교 청소년이자 탈가정 청소년이었다.(‘탈가정’은 청소년이 집을 나오는 것을 부정적으로 일컫는 ‘가출’ 대신 사용하는 대안적인 용어다.)

그는 한국 사회가 청소년에게 당연한 듯 가하는 수많은 차별과 통제를 견디기 어려웠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이어간 예림은 틈틈이 청소년인권이나 학생인권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다.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그는 청소년 인권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예림은 그곳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학교와 집에서 이뤄진 억압과 통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임을 깨달았고, 그 문제로 인한 불편함에 공감하며 함께 무언가 바꿔가자는 청소년 활동가들이 옆에 있었다. 연대와 환대의 첫 경험이었다.

탈가정 청소년 향한 편견 마주하며

학교와 집을 나온 것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예림은 ‘가출청소년’을 향한 손가락질과 미성년자여서 겪는 난관에 수없이 부딪혔다.

편의점, 콜센터 등 생활을 위한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이어가는 과정에서 최저시급을 받지 못한 적도 있고 근로계약서 작성이나 주휴수당 보장 등이 이뤄지지 않는 일이 흔했다. 청소년으로서 주거공간을 구하는 일도 어려웠다. 활동하면서 만난 한 대학생의 명의를 빌려 인천 부평에 3평 남짓 되는 고시원 방을 구했지만 이후로도 계속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서울에 있는 고시원에 잠시 머물기도 했고, 동료 활동가가 여동생과 사는 집에 석 달 신세를 지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마침내 자기 이름으로 원룸을 계약했지만 주거 침입 문제를 겪으며 그곳에서도 오래 지내지 못했다.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도 예림은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간다는 해방감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처음 구한 고시원 방은 창문이 없어 빛도 안 들어오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곳에서 거짓말처럼 아토피가 낫는 경험을 했다. 공동체 실험도 이어갔는데, 탈가정 청소년을 위한 대안 주거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동체은행 ‘빈고’에서 보증금을 빌려 인천 부평구 동암 지역에 청년주거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갈 곳이 없어 여기저기를 전전할 때마다 그의 곁을 지켜준 건 동료 활동가들이었다.

“각자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다양한 실천을 하는 활동가 친구들이 늘 저에게 버팀목이 돼줬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있잖아요. 주거공간, 음식, 자본주의 사회니까 돈도 필요하고요. 한 청소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사회가 아닌 그 친구들이 저에게 제공해줬어요.”

해방감을 주는 뜨개 브라렛을 만들다

2017년 성인이 된 예림은, 더욱 적극적인 이주자가 되어 여러 집을 오갔다. 워킹홀리데이로 1년간 머물렀던 캐나다 토론토에서의 시간은 큰 전환점이 됐다. 예술가로서의 꿈과 비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림 그리기, 도자기 만들기 등 일상 속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다. 차별 감수성이 높은 사회에서 지내면서 절로 몸과 마음이 평안해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광주광역시에 있는 공방에서 도자기 공예를 깊이 배우며 지냈고 이후 인도·유럽·모로코 등으로 여행을 다니며 예림의 삶에는 ‘생태’ ‘예술’ ‘영성’ 등의 단어가 자리잡았다.

“다양한 곳에서 지냈지만 특히 숲에서 보낸 시간이 깊은 영감을 주었어요. 체코에 갔을 때 호스텔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소개해준 덕에 생태공동체에서 머문 적이 있고요. 한국에서는 넥스트젠코리아가 운영하는 전북 순창의 ‘모두의숲’에서 한 달간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어요. 숲에서 보낸 이야기를 제 안에 잘 담아두는 시간이었어요.”

오랫동안 이집 저집을 다니며 마주한 수많은 장면과 그 속에 있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예림을 ‘예술로 세상을 바꾸는 예술실천활동가’로 만들어줬다. 요가 지도자 교육과정을 마치고 요가명상안내자가 됐고, 숲에서 영감받은 것을 만들고 나누는 공예예술가가 됐다. 성평등과 청소년인권 등에 관한 글을 지속해서 쓰면서 작가의 입지도 다지고 있다.

2021년 9월, 서울에 있는 공유주택 ‘맹그로브’의 입주 작가로 선정돼 3개월간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머물 때는 일로 크게 성장하는 시간을 가졌다. 숲에서 담은 이야기를, 원석 액세서리와 뜨개(크로셰) 브라렛을 만드는 브랜드 ‘소울보따리’로 풀어냈다. 소울보따리의 대표 제품인 ‘뜨개 브라렛’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문화예술교육 혁신 시범사업 성인부 대상을 받기도 했다.

탈출하고 싶던 본가는 힘이 돼주는 공간으로

“뜨개 브라렛은 뜨개질로 만든 와이어와 패드가 없는 브래지어인데요. 숲에서 생활할 때 친구들이 이것만 입고 일하거나, 계곡이 보이면 바로 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해방감을 느꼈어요. 기존에 알던 브래지어의 답답한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이었죠. 이후에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미 청년주거공동체를 경험한 예림이지만, 여러 아티스트와 함께 지내는 맹그로브 공유주택은 특별했다.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코워킹 공간, 여러 자료를 볼 수 있는 도서관, 요가와 명상이 가능한 릴렉스룸, 예림이 가장 좋아했던 20층 옥상 공간까지. 함께 지내는 멤버들과 동네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는 ‘줍깅 클럽’도 있고, 도시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나온 예림은 현재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작은 투룸에 살고 있다. 생애 첫 전셋집이다. 숲을 모티브로 꾸민 작은방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햇살이 잘 드는 방에서 아침을 맞으며 요가를 하고, 글을 쓰거나 뜨개질한다. 방 한쪽에는 예림이 직접 만든 도자기와 태워서 향을 내는 인센스스틱 등이 놓여 있다. 큰방에서는 2022년부터 온라인 요가 수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제 예림은 탈가정보다 독립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스물여섯 살이 됐다. 긴 시간에 걸쳐 부모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10대 때 예림이 탈출하고 싶었던 인천의 본가는 지칠 때마다 힘이 돼주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그가 청소년 시기에 시도한 자립은 탈출이자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여러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무너지고 깨지는 경험을 숱하게 겪으면서도 예림은 그 안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힘을 기르는 법을 배웠다.

‘자선사업가’라는 꿈

“‘어린 여자 청소년도 자신이 원하는 주거 방식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배움에서 얻은 목소리죠. 물론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수도 있지만요. 결국 우리 사회도 이런 목소리가 모여 변화를 느리게나마 맞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자유롭게 생활하고 예술가로서 작업을 이어가는 공간을 갖게 된 지금, 예림은 청소년 시기에 보낸 시간을 가끔 잊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부당함 속에서 부서지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의 손길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자신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보탬이 되는 ‘자선사업가’라는 꿈도 생겼다. 2021년 자신이 만든 브랜드인 소울보따리의 첫 수익을, 처음 탈가정했을 때 무료로 상담해줬던 단체에 전액 기부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이런 마음은 예림이 공저자로 참여한 책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일다)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문장에 스며 있는 따스함이 좋아 책을 몇 번이고 읽었다.

“헤아리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하는 이유는 여전히 많은 청소년에게 집은 자유를 앗아가는 공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공감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 청소년을 포함한 누구나 자기답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숨을 쉬며 살 수 있도록 나의 사랑을 보낸다.”(<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예림(라일락) 글 중에서)

채혜원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chaelee.p@gmail.com

*바깥에 사는 사람: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가서 지역살림을 꾸리고 공동체에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바깥에서, 길 위에서 그들이 전하는 희망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칼럼 제목은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2013년) 수록작에서 따왔습니다. 4주에 한 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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