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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말랭이에서 시작된 ‘봉테일’

<플란다스의 개>부터 <옥자>까지 ‘봉준호의 디테일’을 김영진 평론가가 분석하다
등록 2019-06-01 03:55 수정 2020-05-02 19:29
칸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봉준호 감독(오른쪽)이 주연배우 송강호에게 상을 바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CJ ENM 제공

칸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봉준호 감독(오른쪽)이 주연배우 송강호에게 상을 바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CJ ENM 제공

봉준호 감독의 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도 호들갑을 떨어보았습니다. 김영진 영화평론가에게 ‘봉준호의 미학’에 대해 글을 부탁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미술, 음악, 연기까지 모두 챙기는 완벽주의로 ‘봉테일’이라고 불립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이 뻔한 만 빼고 그의 미학을 촘촘하게 분석합니다. _편집자

봉준호는 자신의 데뷔작 를 어느 대학 특강 자리에서 “무말랭이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기의 소산”이라고 회고했다. 강아지 실종을 둘러싼 서울 모처의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인 이 영화는 일상의 사소한 무늬를 그려나가며 거대한 감정의 파장을 겪게 하려는 젊은 봉준호의 야심작이었으나, 눈 밝은 영화인들과 평자들에게만 화제가 됐을 뿐 흥행은 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숲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화면이 서서히 물러나면 아파트 거실에서 본 풍경이라는 게 밝혀지는 이 영화의 초반 장면은 장르 규범을 다루는 봉준호의 반역적 창의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는 최대한의 미끼를 서사에 던진 다음, 관객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 데려다놓고 당황하게 한다.

‘밥은 먹고 다니냐’ 복합적인 감정

봉준호의 두 번째 영화 은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 스릴러 외양을 띠지만 실화에 기초한 대로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는다. 이 영화의 최대 트릭은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인 우리가 미제 살인 사건 이야기라는 걸 깜빡 잊게 한다는 데 있다. 이 장르의 이야기 규범에 따라 탐문을 거듭하며 퍼즐 맞추듯 용의자를 좁혀가는 과정이 묘사되고 활기찬 추적 장면이 스릴을 안겨주지만, 지나고 보면 다 헛소동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충무로에 돌 때 떠돈 가장 흔한 풍문은 ‘재미있으나 범인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흥행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었다.

거꾸로 이 영화는 관객을 실망시키기는커녕 격한 공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헛발질을 거듭하는 형사들의 수사 플롯(줄거리) 너머로 1980년대 한국 사회가 줄기차게 화면에 소환된다. 등화관제 시대로 요약되는 5공화국 시절에 공권력이 민초를 보호해주지 못했던 대한민국의 불우한 상황은 나름 성실했으나 공권력의 부적절한 매개인이었던 두 형사, 송강호와 김상경의 육체와 표정으로 새겨 진다.

문제-해결 플롯의 막판에 들어서게 했다가 모든 걸 무위로 돌리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절정)에서 박두만 형사 역의 송강호는 비 오는 낮 어두운 터널 앞에서 용의자 박현규를 연기하는 박해일을 두고 그 유명한 대사를 한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밥은 먹고 다니냐? ××놈아.” 공권력을 집행하는 형사이자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위법 행위도 불사하는 가해자인 박두만이 눈에 슬픈 기색을 머금고 핏발이 선 박현규를 향해 증거를 찾아낼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한탄함과 동시에, 용의자이자 섣부른 수사의 피해자였던 상대에게 건네는 위로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은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이 특정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 화면 속 공기로 퍼져나가게 한다. 송강호와 박해일의 얼굴을 보여주는 대담한 클로즈업(확대)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이점을 넘어버린다.

<플란다스의 개>(2000), <괴물>(2006), <마더>(2009). 각 영화사 제공

<플란다스의 개>(2000), <괴물>(2006), <마더>(2009). 각 영화사 제공

이전에 보지 못한 미증유의 풍경들

천만 관객이 넘는 흥행을 기록한 에서도 장르 서사 규범의 전제를 교란하는 봉준호의 재능은 서사 바깥으로 튕겨나오는 숱한 인상적 이미지들로 드러난다. 한강에 출몰한 괴물이 일으키는 재난극인 이 영화에서 과 마찬가지로 공권력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우한 분투기가 묘사되는 가운데 어느 한국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 시각적으로 촘촘히 전시된다. 한강 다리 밑의 배수구와 교각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를테면 노숙하는 소년들이 괴물의 출현에 놀라 어두운 밤 한강 근처를 도망치며 달릴 때 그들이 통과하는 배수구와 그들 앞에 놓인 컴컴한 한강의 이미지가 괴물의 아가리와 배 속처럼 시각적인 공포와 경이를 안긴다.

영화 속 괴물은 한강 배수구를 제집 삼아 서식하고 인간들을 먹고 남은 뼈들을 그곳에 토해내는데, 괴물에게 잡힌 주인공 소녀 현서가 공포에 차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장면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더럽고 위험한 공간에 갇힌 피해자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집단적 피해의식을 장엄하게 끌어낸다.

어두운 그늘을 초미세로 비추다

의 마지막 장면에서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를 괴물을 경계하면서 딸을 잃은 대신 얻은 노숙자 꼬마를 아들 삼아 밥을 먹이는 강두의 모습은 에서 국민 어머니 김혜자의 연기를 통해 극단적으로 비틀린 채 되풀이된다. 살인범 누명을 쓴 아들의 혐의를 벗기려는 어머니의 필사적인 노력을 담은 봉준호의 네 번째 영화 는 원인과 결과가 정의의 인과응보로 맺어지는 상업영화의 규범을 대담하게 위반하면서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초미세 거리로 다가간다.

원빈이 연기하는 바보 아들 도준이 실제 살인범인지 아닌지 영화는 끝날 때까지도 모호하다. 주인공 김혜자의 초인적인 모성애는 히스테리와 강박과 죄의식이 결합된 어둡고 슬픈 정체성의 흔적으로 드러난다. 살인 사건이 있었던 그날의 현장에 대한 증언은 증언자의 시점에 따라 다르며 겉으로는 평화로운 마을 공동체의 속내는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미친 듯이 애쓰는 개별자들의 초조와 불안으로 헐떡인다.

김혜자는 열정과 광기의 중간 지점에 있는 인물의 모난 행동을 엄청난 기운으로 토해놓는다. 카메라는 서슴없이 과감한 클로즈업으로 그런 주인공에게 우리를 밀착하게 만든 다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관광버스에서 춤추는 그를 하나의 흐릿한 점으로 포착하면서 말로 환원될 수 없는 감정을 화면에 남겨놓는다.

<설국열차>(2013), <옥자>(2017). 각 영화사 제공

<설국열차>(2013), <옥자>(2017). 각 영화사 제공

한정된 공간에 펼친 SF

이후 봉준호가 만든 는 씨제이이앤엠(CJ E&M)이 제작비 430억원을 투자해 주요 배우와 스태프를 외국인으로 꾸리고 만든 미래 배경의 이야기다. 빙하기를 맞아 멸망한 지구 곳곳을 끝없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하층계급과 지배계급의 대결을 담았다. 열차의 맨 끝에 있는 하층계급 인간들이 상층계급이 사는 앞칸에 도달하기 위해 처절하게 치르는 전투의 와중에 송강호가 연기하는 주인공 남궁민수는 약물에 취한 채 이 상황과 홀로 동떨어져 있으며 전투에 합류한 후에도 열차 바깥으로 탈출을 꿈꾼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탈선한 열차 바깥으로 도망칠 때 동행하는 한국인 소녀를 연기하는 배우는 에서 희생당한 딸 현서를 연기했던 고아성이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묘하게 과 공명하는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열차 안에서 기승전결 이야기가 펼쳐지는 는 ‘무말랭이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자아낸다’는 야심이 가장 멀리까지 뻗어나간 표식일 것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공상과학(SF)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려는 이 야심은 실제 공간과 영화적 공간의 간극을 최대한 메우려는 시각적 설계를 바탕으로, 계급투쟁이라는 20세기적 서사를 약에 취한 무정부주의자 주인공의 모험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비전으로 전이한다.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시각적 화음

반면 넷플릭스 투자로 만든 500억원 규모의 대작 는 강원도 산골과 뉴욕 대도시를 주된 배경으로 삼아 반환경적 유전자조작 사업에 몰두하는 미국 대기업 종사자들과 농경 사회의 목가적 이상을 담보하는 산골 소녀 의 성립하기 힘든 대결 스토리를 봉준호 영화들 가운데 가장 얌전하고 경쾌하게 담아낸 소동극이다.

주인공 미자와 유전자조작 슈퍼돼지 옥자의 일상사를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는 옥자가 미국 대기업의 판촉 행사에 동원될 수단으로 이송당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활기찬 추적극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강원도 산골 지형과 그 못지않게 지형이 변화무쌍한 서울의 도심 공간은 결이 다른 입체감이 살아 있으며 수평과 수직의 면을 분방하게 교차해 시각적 화음을 만들어낸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두 편의 최신작은 보편적 주제를 겨냥한 준수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기승전결 플롯을 교묘하게 위반하고 한국적 공간의 결을 살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을 그 공간에 절묘하게 삼투시키는 봉준호식 세계의 매력이 덜한 영화들이었다.

은 봉준호가 다시 한국 공간에서만 가능한 한국적 이야기를 봉준호식 개성으로 버무려 그가 영화적 은사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는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 를 21세기 버전으로 새롭게 확장 개편한 흥미진진한 작품일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김영진 영화평론가·전주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은 어떤 영화


백수 가족의 희비극


은 봉준호 감독이 여러 기자에게 특별히 편지를 보내 ‘스포일러’를 막아와서 줄거리 공개가 아주 제한돼 있다. 영화 메인 카피는 ‘새로운 가족희비극’이다. 기택(송강호)은 여러 사업을 했지만 현재는 백수로 지낸다. 아내 충숙(장혜진)과 아들 기우(최우식), 딸 기정(박소담)도 직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피자 포장지 접는 일을 하면서, 다른 집의 와이파이를 잡아서 문자를 보내며 생활한다. 5수생 기우는 친구가 교환학생 가면서 추천한 벤처사업가(이선균)의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한다. 기우는 자신의 입학증을 위조해준 동생(박소담)을 부잣집에 미술 교사로 소개한다. 기택은 운전기사로, 충숙은 가정부로 4인 모두 부잣집 취직에 성공한다.
사회복지 정책의 혜택을 받는 이들을 공격하는 표현인 ‘기생충’을 제목으로 갖고 오면서, 이 ‘기생 생활’에 뻔뻔함까지 더함으로써 영화는 분명하게 사회적 질문을 던진다. 201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제 ‘만비키(좀도둑) 가족’)에 나온 “가게의 물건들은 주인이 없으니 훔쳐도 된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적인 발언과도 일맥상통한다.
봉준호 감독은 을 “한국 관객이 봐야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는 디테일”이라고 말했는데, 칸영화제에서 프리미어 공개 뒤 외국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황금종려상으로 결정된 뒤 봉 감독은 “엄살”이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이 영화가 “김기영 감독과 같은 한국의 위대한 감독들의 전통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라며 한국 영화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된 의미를 짚기도 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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