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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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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평범함’을 깨닫는 것이 성장

‘나만 불행하다’ 느끼는 청소년의 성장기,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등록 2018-12-29 05:04 수정 2020-05-02 19:29
<토니오 크뢰거…>, 민음사 펴냄.

<토니오 크뢰거…>, 민음사 펴냄.

소년 토니오는 미소년 한스에 대한 애착으로 괴롭다. 조용히 책 읽고 시 쓰기를 좋아하는 토니오와 정반대로 한스는 스포츠를 즐기며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끈다. 토니오가 복잡하고 내성적이라면 한스는 단순하고 외향적이다. 토니오는 한스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불타오르는 질투심이 섞인 동경”을 느끼기에 더욱 애탄다. 토니오는 한스와 독서 취미를 나눌 수 없고 그에게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해서 절망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사랑의 고통을 벌써 깨닫는다.

친구,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

동성 친구에 대한 사랑에 가까운 우정으로 앓는 청소년, 친구를 사랑하는 동시에 질투하는 청소년은 소설이나 현실에서 넘쳐난다. 자아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이 청소년의 보편적 심리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친구를 거울 삼아 자아정체성을 구축한다. 친구는 자기를 형성하는 데 쓰이는 질료다.

나는 누구인가. 청소년의 가장 큰 궁금증이다. 이 질문에 친구만 한 참고 문헌이 없다. 청소년은 친구를 면밀히 관찰하고 그와 자신을 사사건건 비교한다. 그에게 있으나 자신에게 없는 것, 그에게 없으나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청소년은 자기에게 없는 친구의 자질을 동경하면서 모방하고, 친구와 절대 같아질 수 없는 자기 자질을 부정하거나 긍정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한다. 친구와의 비교는 청소년의 숙명이요, 친구와의 다름은 정체성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하여 청소년은 자기가 누구인지 궁금한 만큼 친구에게 빠져들고 신경 쓰며 사랑하고 질투한다.

친구에 대한 열광은 곧잘 열등감을 동반하기에 난감하다. 청소년은 친구와 다름을 빌미로 근거 없는 열등감에 빠진다. 저마다의 색깔대로 각자 좋음을 아직 알지 못하기에, 다름을 열등함의 지표로 여긴다. 친구는 무작정 근사해 보이고 자신은 한없이 작아 보인다.

유난히 예민한 토니오는 사물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통찰력을 가졌다. 어른들과 친구들의 허위를 꿰뚫어보며 “사물이 복잡하고 슬프게 되는 곳까지 들여다보”곤 한다. 단순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고독하다. 반면 한스는 늘 명랑하고 행복하며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 같다.

토니오는 스스로를 상식적이고 정상적이지 않다고 여기며, 사람들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어 치명적인 열등감을 느낀다. 한스처럼 되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예민함과 통찰력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주 같다. 그는 한탄한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이상하게 생겨먹어서 모든 사람과 충돌하는 것일까.” 토니오는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는 것 같다.

토니오뿐만 아니라 많은 청소년이 납득하기 힘든 어이없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낀다. 상상을 초월한 미세한 국면까지 촉수를 뻗어 무수한 열등감을 만들어낸다. 그 아이처럼 예쁘게 웃지 못해서, 청순해 보이지 않아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사연 있어 보이지 않아서 등등. 열등감과 그 원인을 연결하는 인과관계는 허술하다. 청소년의 자기 평가는 중용을 모르고 정신없이 널을 뛴다. 아직 자기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갖추지 못했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어여쁨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찬란한 재능, 한때의 단점

토니오가 그토록 저주했던 예민함과 통찰력은 결국 소중한 재능이었다. “위대한 단어들의 실체를 꿰뚫어보도록 만들었으며, 그에게 사람들의 영혼과 자기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힘 덕분에 그는 인정받는 작가가 된다. 열등함이라 여겼던 자기 성향이 실은 재능이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는 청소년 성장에서 중요한 계기를 암시한다. 백조 새끼는 오리들 틈에서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자기 비하에 시달렸다. 그런데 다름은 아름다운 백조로 성장하게 한 씨앗이었다. 다름 또는 약점은 때로 찬란한 재능이다.

약점인 줄 알았던 산만하고 엉뚱한 성격이 기발한 창조력이라는 재능을 선사한다. 단점인 줄 알았던 소심한 성격이 섬세하고 꼼꼼한 작업 수행 능력으로 발전한다. 열등감을 유발했던 자질이 실은 재능임을 발견하는 순간 청소년은 성장한다.

열등감을 극복했지만 토니오는 여전히 타인과의 이질감 때문에 괴롭다. 세계와 말과 행동 뒤에 숨은 궁극적인 것을 보았으나, 그것은 결국 우스꽝스러움과 비참함뿐이었다. 사물을 통찰하는 것만으로 죽을 만큼 구역질나기도 했다. 이런 참혹을 보아버린 자신이 낙인찍히고 저주받은 것 같다. 명랑하고 행복하며 건전한 보통 사람들과 치명적으로 다르다고 여기기에, 그는 고독하다. 자신이 특별하며, 특별하기에 남다른 고통을 겪는다고 믿는다.

그런데 연인 리자베타는 그가 “길 잃은 시민”, 즉 평범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토니오는 충격을 받는다. 결국 자신이 아내와 아들과 함께 “평범한 행복 속에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어 하는 한 시민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자신의 보편성 또는 평범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그는 뿌리 깊었던 소외감을 극복한다.

청소년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만 특별한 고통을 느끼며, 자기만 특별한 성정을 타고났다고 여긴다. 자기 아버지만 사업에 망했고, 자기 부모만 자식에게 가혹하며, 자기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만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어떤 고통이나 성정도 타인의 그것과 닮았다. 모든 고통은 소통할 여지를 지니며, 모든 성정은 선례를 가진다. 이렇게 자기의 고통과 성정의 보편성을 깨달을 때 청소년은 성장한다.

고통이 저만의 것이고 소통 불가한 것이라고 믿는 청년은 두 배로 괴롭다. 연인에 대한 미칠 듯한 질투로 괴로운 청년은 자신만 비정상적인 고통을 느낀다고 여겨서 더욱 괴롭다. 정신병자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질투가 보편적 감정임을 알면 적어도 자기 비하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다.

과민함과 지나친 상상력으로 괴로운 청년은 저만 특별한 것 같아서 이중으로 괴롭다. 자신이 비정상적인 괴물 같다. 그런데 과민함과 넘치는 상상력을 지녔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조금 유별난 대로 그럭저럭 평범한 사람임을 깨달으면서 고립감과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다.

정상·비정상 가르는 기준은 경험

결국 자기 고통이나 성정의 보편성을 깨닫는 계기가 중요하다. 많이 만나고 배워야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타인의 삶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해야 한다. 직접 만남이 한계가 있을 때 인문학과 소설이 유용하다. 특히 소설은 다양한 인간과 그 고통에 대한 기록이다. 훌륭한 소설일수록 상상을 초월한 고통과 기이한 성정을 기록한다. 괴이한 고통과 성격을 그린 작품일수록 높게 평가받는다. 그것이 정상적인 것의 인정 범위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편협한 정신에는 많은 것이 비정상이다. 보고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정상을 비난하기에 바쁘며, 자신의 비정상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실은 비정상인 듯한 자신의 무엇을 수치스러워한 나머지 그것을 들킬까봐 타인의 비정상을 더욱 맹렬히 공격한다.

박식한 영혼은 아무리 기이한 것도 어디선가 이미 봤기에 비정상이라고 쉽사리 단죄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긍정하며,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자신의 면모도 당당하게 밝힌다. 비정상인 줄 알았던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수용할 때 청년은 성장한다.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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