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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저무는 육필의 시대를 위하여!

등록 2003-08-28 15:00 수정 2020-05-02 19:23

문학동네에서 ‘글씨’로 수업하던 날들을 떠올리며… 그렇다면 글을 ‘쓸’ 것인가 ‘칠’ 것인가

육필의 힘은 언제나 나를 압도한다.

서울 남산 아래에 있는 ‘문학의 집’에서 문인들의 육필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본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원고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의 원고는 원고지 칸을 또박또박 채운 게 아니라, 백지의 여백을 빈틈없이 메운, 무슨 추상화 같은 느낌으로 처음에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백지를 메우고 있는 것은 정말 깨알처럼 촘촘하게 들어박힌 글자들이었다. 글자 하나가 얼마나 작은지, 개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상에 다름 아니었다. 평소에 선생은 매우 호탕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고 있었는데, 작업에 들어가면 저리 꼼꼼한 ‘좀팽이’의 글쓰기를 하시는구나 싶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작은 글자 하나마다 혼을 불어넣으며 글쓰기에 임했을 시간을 생각하니, 그 육필 원고 앞에서 나는 저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육필 원고 앞에서 웃깃을 여미던 기억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무렵,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문예반에 들어가면서 내가 맨 먼저 배운 ‘문학’은 선배들의 글씨체를 흉내내는 일이었다. 선배들처럼 글씨를 써야 적어도 선배들과 같은 수준의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선배는 그때부터 만년필로 아주 예쁘고 멋진 글씨를 썼다. 함부로 흘려 쓰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모범생의 필체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문학청년의 냄새가 나는 그런 글씨였다. 그 필체를 연습한 덕분에 나는 그 선배의 ‘귀여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고, 때로 선배의 소설을 원고지에 옮겨 쓰는 대필자로서의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 선배의 필체는 참으로 희한하게도 나를 거쳐 몇해 동안 내 후배들을 감염시켰다. 우리는 글씨를 통해 원고정서법뿐만 아니라 문학청년으로서의 자세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습작 시절에는 글씨 못지않게 어떤 원고지에다 글을 쓰는가 하는 것도 우리들의 매우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흔히 문방구에서 구할 수 있는 붉은 줄이 쳐진 원고지는 첫 번째 기피 대상이었다. 우리는 뭔가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특정한 기관이나 단체, 출판사나 신문사 이름이 찍힌 원고지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우쭐댈 수 있었다. 문인들이 스스로 디자인한 개인용 원고지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는 나도 한번은 그것을 흉내낸 적도 있다. 그때 거금을 들여 미색 모조지에 찍은 녹색 줄의 400자 원고지는 옛날 습작 노트 속에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지와 육필의 시대는 그 빛나던 야성을 잃고 점점 과거 속으로 들어앉고 있다. 가끔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가 보면 그런 필체와 그런 원고지를 만날 때가 있다. 인쇄한 지 좀 오래된 듯 원고지의 모퉁이는 빛이 바랬고, 아주 유려한 만년필 필체로 정성을 들인 원고 말이다. 원고를 작성한 방법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연령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원고에 쓰인 언어는 수십년 전의 정서와 감각에 머물고 있기 십상이다. 세상으로 나가야 할 시기를 놓친 원고를 옆으로 제쳐두면서 나는 원고지라는 형식의 종말을 쓸쓸히 지켜보곤 하는 것이다. 실제로 신춘문예에 원고지에 육필로 작성한 원고가 예심을 통과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출판사에 원고 보내는 방식의 변천사

나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일곱권의 시집을 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출판사에 넘기는 원고의 형태도 세월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첫 시집 은 당시 민음사의 주간으로 일하고 있던 황지우 시인의 제안으로 내게 되었는데, 그는 시집 출간 계획을 편지로 알려왔다. 갓 등단한 지방 시인이 당대 문학의 한 ‘중심’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나는 서둘러 뿔뿔이 흩어져 있던 시를 200자 원고지에 정리했고, 직접 우체국에 가서 출판사로 부쳤다. 두 번째 시집 (1989년 발행)과 세 번째 시집 (1991년 발행)에 실린 시들은 마음먹고 장만한 ‘마라톤 타자기’로 쓴 것들이다. 자판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쌓일 때마다 글쓰기의 괴로움도 쌓여갔지만, 글자를 쓰지 않고 친다는 것은 나로서는 신기하기만 한 일이었다. 타자기의 자판은 글을 쓰는 일의 엄격함을 시종일관 나에게 가르쳐주는 ‘선생’이기도 했다.

어느 날, 밤늦게 술에 취해 우리 집에 쳐들어온 후배 중의 하나가 나의 타자기 위에 ‘오바이트’를 한 사건이 벌어졌다. 오물을 뒤집어쓴 수동 타자기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전동 타자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수동’에 비해 속도가 빠르고 소음도 적은 ‘자동’을 살까 말까 저울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내 경제는 그런 호사를 누릴 만큼 넉넉하지 못했고, 또 ‘자동’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곧 개인용 컴퓨터라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색 화면과 거기 쓰여지던 흰 글씨들, 그리고 타자기와는 다른 자판 형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수리 타법을 사용하던 286 컴퓨터! 나는 한 후배의 출판기획사 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대면했다. 일반적인 타자기와 달리 무진장 지웠다가 다시 쓸 수 있다는 컴퓨터의 기능에 나는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나는 시를 쓸 때 보통 수십장의 파지를 내는 게 습관처럼 굳어버렸다. 그런데 컴퓨터는 얼마든지 많은 양을, 언제든지 고쳐 쓸 수 있는 기계였다. 글을 ‘쓸’ 것인가, 글을 ‘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술자리의 안줏거리로 등장하기도 하던 시절에, 나는 서슴없이 글을 ‘치는’ 쪽에 줄을 서버렸다. 퇴고의 자유로움이 첫 번째 이유였다. 네 번째 시집 (1994년 발행)에 들어 있는 시들은 286 컴퓨터와 도트 프린트가 낳은 자식들이다. 그 뒤 다섯 번째 시집 (1996년 발행)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때까지만 해도 A4용지에 출력한 원고를 우편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치’는 데 익숙해져 함부로 ‘쳐’서야

원고를 이메일을 통해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가히 혁명적 변화라 할 만하다. 마감 시간 직전에 몇번의 클릭으로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우체국에 갈 필요도 없고, 우표에 침을 바를 일도 없어져버렸다. 놀랄 만큼 편리해졌으나, 때로는 이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작 석줄밖에 안 되는 나의 시 ‘너에게 묻는다’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가 전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제목이 ‘연탄재’로 바뀌는가 하면 수많은 변종들이 생겨난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지금 글을 ‘치’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그렇다고 글을 함부로 ‘쳐’서는 안 되겠다.

안도현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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