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 내용   2008년08월14일 제723호
척하기

▣ 윤용인 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아날로그 시대에 통기타 노래책이나 주간지 뒤쪽에는 펜팔이나 취미 공유 코너가 꼭 있었다. 그렇게 소박했던 만남은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함께 양적으로 질적으로 ‘상전벽해’했다. 온라인 안에서 누구나 쉽게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생적으로 판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도 덕분에 바빠졌다. <딴지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나는 ‘응가’ 하다 번쩍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즉시 놀이터를 만들었다. ‘떼깔단’(식도락 커뮤니티), ‘묻지마 관광’(여행자는 어디 가는지 모르고 쫄래쫄래 따라오는 것), ‘결혐당’(준비된 결혼, 당당한 이혼을 주장하는 당) 등이 그래서 탄생했다. 모임은 호황이었고 회원은 늘 만원이었다.

그러다가 내 회사를 만들었을 때, 나는 이미 마흔을 바라보고 있었고 덕분에 나는 중년들의 놀이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한량’. 서른다섯 살 이상으로 회원 자격을 제한한 이 커뮤니티는 놀 곳 없어 방황하던 늙다리들을 구원했다. 나이 든 사람이 논다는 것이 주로 술을 매개로 하여 세상살이를 수다 떠는 것인데, 사람도 술처럼 숙성의 맛이 있는 듯했다. 온라인 게시판에서 ‘노땅’들은 지(知)적이었고 빛나는 유머를 구사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관용과 상호 간의 배려가 넘쳤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 실험적으로 만든 게시판이 바로 ‘익명’ 게시판이다. ‘벽 보고 입방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에서는 글쓴이도, 댓글 다는 이도 자신의 아이디를 숨긴 채 유령으로만 존재한다. 살면서 속상할 때, 그렇다고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기에는 쪽팔릴 때 이곳에서 거침없이 속내를 배설하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모임의 운영자로서 나는 이 게시판을 보며 씁쓸해한 적이 꽤 있다. 낮과 밤이 다르듯, 기명 게시판과 익명 게시판의 너무나 다른 모습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회원들이 쓴 것일 텐데, 익명 게시판에서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치사한 뒷담화만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페르소나의 상실이라고 해석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등장하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은 인격 혹은 위격을 뜻하는 라틴어다. 가면 쓴 인간, 즉 ‘척하기’가 페르소나인 셈이다. 친절한 척하기, 겸손한 척하기, 이해하는 척하기. 이 말은 자칫 위선 혹은 이중성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사회적 존재에게 ‘척하기’는 일종의 의무일지 모른다. 배우가 무대에서 자기의 배역에 충실하는 것이 미덕이듯, 성인은 사회 속에서 관계의 기대에 충실해야 한다.

페르소나 없이 살아가는 것은 순수가 아니라 미성숙이다. 익명 게시판의 악취처럼, 가면을 벗은 사람은 스스로 자유로웠으나, 그 자유만큼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때려도 원래 그 사람 마음은 착하며, 술주정이 있어도 본심은 선한 사람이라는 식의 말도 듣는다. 그렇게 말하는 이의 한없는 이해심은 존경스러우나 나는 다 큰 사람의 순수하고, 진정하며, 착한 속내에는 관심이 없다. 그 사람이 나에게 순수하고, 진정하며, 착한 행동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내 악취를 향수로 숨기듯, 나도 타인의 악취를 맡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인간 사이의 아름다운 거리감은 바로 ‘척하기’에서 나온다. 각자의 가면은 혼자만의 골방에서나 벗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