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조계완의 핑크칼라 > 내용   2008년06월30일 제717호
여성 노동자, 힘내세요

‘유연한 노동’ 정책의 첫번째 희생자, 가사와 노동을 병행하거나 아예 출산을 포기하며 싸우는 그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외환위기 직후 대량실업 사태 속에서 ‘고개 숙인 아버지’ 담론이 퍼지고, 그 뒤 경제 불황을 거치면서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노래가 확산됐다. 가계를 책임지는 임금노동자로서의 남성만 강조될 뿐 실직 위협을 당하는 ‘여성’은 빠져 있었다.


△ 이제 ‘아빠, 힘내세요’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 힘내세요’를 노래할 시점이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뒷마당에서 점심을 끝내고 산책하는 직장인들. (사진/ 한겨레)

그러나 생산 영역에서 여성의 역할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골드미스’(30∼40대 고학력·고소득 미혼 여성)가 유행하고, 여성 임금노동자들이 급증하는 등 여성들은 가정 바깥의 ‘시장 노동’으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 단순히 소비 주체로서가 아니라 생산 주체로서 여성들이 급속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여성노동자들은 ‘유연한 노동’ 정책의 희생자가 되기 십상이다. 비정규직과 같은, 임금 수준이 낮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데다 잦은 고용 변화에도 노동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온순한 노동력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경제위기가 닥치면 여성은 ‘유연한 노동력의 보유자’이자 산업예비군으로 인식된다. 즉, 경기가 상승하는 국면에 대거 늘어났다가 하강 국면에 들어서면 먼저 축출된다. 그런 점에서 노동시장은 여전히 남성 편향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포드자동차 공장 노동력의 25%는 여성들이었다. 군대로 빠져나간 남성노동자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여성 노동력 비율은 4%에 불과했다. 일부 여성은 자발적으로 가정주부 자리로 돌아갔으나, 더 많은 여성들은 높은 임금을 받는 포드공장 일자리에 남아 있고 싶어했다. 하지만 대부분 강제 퇴직당했고, 공장은 다시 남성들로 채워졌다. 조앤 스콧은 “노동자라는 말은 남성의 생산능력과 기술에 근거한 것으로, 언뜻 중립적 범주로 보이는 남성·여성 분류는 여성에 대한 배제를 은폐하고 여성 차별을 작동시키는 미묘한 방식이었다”(‘젠더와 정치에 관한 몇 가지 성찰’, <여성과 사회> 제13호)라고 말했다.

공공부문을 축소하는 민영화 흐름도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를 약화시킨다. 공공서비스의 최대 수혜자는 시장의 생산노동과 가정의 재생산 노동이라는 이중 부담을 지고 있는 여성들이다. 양육·의료·교육과 같은 공공부문 서비스가 없다면 여성은 시장에서 남성과 비슷한 조건으로 경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공서비스 민영화 시대에 취업여성들이 직면하는 극심한 ‘시간 압박’은 더욱 커지게 된다.

가정 내부로 시선을 돌려보자. 사실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협상력은 서로에 대한 의존 관계에 달려 있다. 경제적 지위에서 열등한 여성일수록 남성 헤게모니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예속>에서 “대다수 기혼여성을 집에 있게 만드는 건 남성이 일자리와 가정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성들은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높은 임금을 기반으로 한 금전적 독립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한다. 반면, 남성은 임금노동을 하고 여성은 무급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전통적인 남녀 노동분업 모델에서 여성들은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선택의 부족’이라는 불평등 관계에 직면하게 된다. 더 많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지만, 여성 일자리가 갈수록 저임금화하는 것도 노동시장의 남성 편향을 온존시킨다.

불평등한 젠더 관계가 유지·재생산되는 배경에는 ‘여성들의 공모’도 있다고 한다. 기존 여성들이 아내 혹은 어머니로서의 젠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동자로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스스로 유보해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경제위기 이후 젊은 여성들의 선택은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특히 노동시장에서 커리어와 지위 확보에 집중하는 여성들의 이런 행동은 사회구조를 크게 뒤흔들어놓고 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출산율이 급감하고 비혼여성도 늘고 있지 않은가? 출산율 급감은 단순히 육아 부담 때문만이 아니다. 젊은 여성들의 성취 욕망이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다. 친족의 도움이나 금전적 자원 등 보살핌 노동을 해결할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한 여성들은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노동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주로 남성들이 법과 제도를 만들지만, 여성들 또한 노동시장에서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사회를 바꾸고 있는 셈이다. 여성 가사노동자(전업주부)들은 어떤가. 비록 공적 노동에 참여하지 않지만 자녀 교육 등을 통해 이른바 ‘가족 사업’에 기여하고,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 화폐소득을 벌어들이는 기혼여성도 많다.

이런 변화 속에서 여성노동자 내부의 긴장도 발생하고 있다. 배은경 서울대 교수의 ‘IMF 이후 10년, 한국 여성 어디에 있나’에 따르면, 보살핌 노동이나 결혼제도와 무관한 삶을 사는 여성들이 늘면서 여성들 간의 차이가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출산과 가사노동 같은 여성 공통의 문제들이 더 이상 보편적 여성 문제로 간주되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한국의 여성들은 이제 남성들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노동생애를 개척하고 있다. ‘여성노동자여, 힘내세요’라는 노래가 필요한 때다.

*‘조계완의 핑크칼라’는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