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

제국의 시대가 부활하고 있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지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 현실은 오히려 ‘제국적 낙관론의 종언’을 보여준다. 1990년대 이래 ‘나 홀로’ 슈퍼파워의 지위를 누려온 미국의 잠재적 경쟁자로 중국과 러시아가 육중하게 부상하고, 유럽연합은 구대륙 전체를 정치·경제적 단일체로 묶어나가고 있다.

지배와 종속의 은밀한 위계구조

제국은 인류 역사의 야누스, 전형적인 이중인격체이다. 그것은 경계 안의 시민들에게는 풍성한 물질적 혜택과 사회적 안전을 약속하지만, 울타리 밖의 ‘야만인’과 저항자에게는 ‘제국의 꿈’과 무자비한 폭력을 동시에 선사한다. 제국의 안팎을 가르는 경계는 상승기에 유연하게 확장되다가, 절정기를 지나면 고정되고, 쇠퇴기에는 딱딱하게 좁혀진다. 주변부의 토착 엘리트들, 곧 제국의 ‘협력자’는 두 영역의 매개자로서 제국의 시민 자격을 하사받고, 주변부 신민들에게 제국의 운명에 동참해 ‘문명’과 ‘자유’와 ‘평화’를 맘껏 누리라고 선전한다.

제국은 중심부 안에서도 지배와 종속의 명백한 또는 은밀한 위계구조를 유지한다. 주로 외부 또는 변방의 자원에 의존하는 제국은 해외에서 거둬들인 전리품을 분배받는 시민층과 그들에게 봉사하는 하층민을 구별한다. 야만인, 이교도, 노예, 농노, 흑인, 외국인, 불법 이주민 등은 시대에 따라 달리 불린 하층민의 이름이다. 고대 아테네와 로마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군사적 정벌과 억압, 노예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었지만, 그나마도 ‘시민층’에게만 한정됐다. 과중한 조세나 부당한 전쟁 동원에 대한 불복종, 탈주, 폭동, 반란, 테러, 독립, 혁명 등은 시민의 지위에서 탈락된 자들이 일으키는, 또는 새로운 ‘시민성’을 모색하는, 사회적 자기교정 능력을 보여주는 반응들이었다.

제국은 압도적 군사력으로 한동안 전쟁 없는 평화를 보장하지만, 약소민족의 자결권을 부인하고 어떤 경쟁자의 존재도 용납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항구적인 불안정의 진원지가 된다. 제국의 깃발 아래 엎드린 모든 민족과 정치·종교집단이 자신들의 ‘열등한’ 지위를 언제까지나 감내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국의 기수가 행진하는 발자국마다 희생자들의 피가 흥건하지만, 제국의 깃발엔 언제나 평화가 아로새겨져 있다.

따라서 제국은 그 자체가 자기모순적 기획이며, 완고한 지배자가 선두에 설 때 그것은 자기파멸적 사업이다. 물론 제국은 상승과 하강의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따라서 자기모순을 극복하고 탈출구를 찾을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제국의 지배자들은 그 반대의 길을 걷는다. 제국사회의 자기모순이 깊어질수록, 제국의 혜택과 평화를 유지할 사회경제적·정치적 능력이 소진될수록, 제국은 한물간 조폭의 우두머리처럼,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강한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식민지 경영’ 또는 ‘자유무역’이라는 이권사업 덕분에 오랫동안 호의호식해온 기득권층이 그러한 ‘과잉팽창’(overexpansion)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서구식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다른 말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열광하는 대중들 또한 제 무덤 파기에 동조한다. 지중해 제국 로마는 정치적으로 공화정 형태를 유지할 때 가장 팽창했으며, 대영제국의 절정기에 일반 시민들은 ‘제국주의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에서도 보통 사람들의 광적인 애국주의가 이라크 전쟁을 추동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역사의 경험으로 볼 때 서구식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제국주의의 반대말이라기보다 상호 보완물이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제국은 흔히 다민족 정치공동체다. 제국의 이데올로기이자 정책의 체계로서 제국주의는 선택된 자들에게는 관용과 포용의 논리지만, 동시에 배제된 자들에게는 불관용과 착취의 논리다. 히틀러의 파시즘은 물론, 짐짓 고상함으로 위장한 영국을 포함해 역사상 어느 제국도 인종주의·민족주의의 편협한 기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국의 모든 구성원이 단기간에 하나의 인종과 민족으로 융합되지 못할진대, 영생을 꿈꾸는 제국은 언젠가는 폭발하게 될 자기해체의 뇌관을 제 몸 속에 품고 있는 셈이다.

19세기 초반 프랑스인 토크빌이 미국이 누리는 훌륭한 자연환경과 평등의 원칙에 감탄해 그것을 ‘예외적인 사회’라고 부른 이후, ‘미국 예외주의’는 그 나라를 이해하는 열쇳말이 됐다. 미국의 풍요, 미국의 민주주의, 미국의 세계 지배 등 모든 것이 결국은 ‘미국이 예외적으로 특별하고 탁월하기 때문’이라는, 일견 현실을 반영하는 듯한 환상이 만들어졌다. 최근 미국의 일부 엘리트가 ‘영원한 아메리카 제국’을 꿈꾸는 것도 그 예외주의의 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 예외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벗어나 냉정한 역사의 궤적과 현실을 관찰하면, 오늘의 미국 또한 역사상 모든 제국들이 가졌던 신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잭 스나이더가 말한 ‘팽창을 통한 안보의 공고화’라는 신화에 매몰된 계급 이기적 엘리트가, 비용이 이득을 초과하는 지점을 넘어 계속 팽창해가는 제국주의적 과대확장으로 오히려 자신들의 안보를 손상하면서, 동시에 제국의 재정 상황을 파탄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동맹보다는 ‘자기포위’를 초래하는 ‘테러와의 전쟁’, 전세계의 700개가 넘는 군사기지도 모자라 폴란드와 체코 등 동유럽 지역에 새로운 기지를 확보하려는 야심, 항구적인 전쟁 상태를 제도화함으로써 야기된 군국주의화 경향, 그리고 대통령 권력의 초집중화 및 시민권의 일상적인 제약으로 인한 공화정과 민주주의 위기 등은 곧 아메리카 제국의 위기, 그 하강곡선의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기회와 풍요 그리고 깊은 그늘

그러나 미국이 당면한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유로화에 비해 추락을 거듭하는 달러화는 세계 기축통화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으며, 날로 누적되는 전쟁비용과 연방예산 및 경상수지의 쌍둥이 적자는 국가의 재정능력에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강력한 경제력으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벌거벗은 군사력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우위를 상실하게 된다. 생산 부문보다 금융 부문의 과잉비대화, 극소수에 집중된 부의 가속화와 중산층의 몰락, 반이민주의의 강화가 상징하는 사회적 공간의 축소 등은 제국의 깊은 그늘이다.

제국 밖에서 그것을 숭모하는 자발적 복종은 특정 제국이 원활하게 유지되는 필수조건으로서 이른바 소프트파워, 즉 제국이 내세우는 보편적 가치와 제도의 우월성이다. 하지만 근래 미국의 상(像)은 인권 억압자, 보편적 규준에서 일탈한 자, 이기적인 침략국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대치되고 있다. ‘아메리칸드림’으로 표현되는, 기회와 풍요의 사회라는 관념도 허공에 흩어지고 있다. 대신 300만 명에 달하는 노숙자, 성인 10명당 1명에 이르는 수감자, 인구의 15%를 배제하는 의료보험, 과대팽창된 제국의 인격적 화신처럼 보이는 도처의 비만자들, 학교와 교회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총기살인 사건 등이 미국의 현실을 대표한다.

자, 사상 최초로 흑인 출신 후보가 당선될지도 모르는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아메리카 제국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앞으로, 제국에 드리운 깊은 그늘 아래서 미국의 엘리트가 보이는 징후적 반응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냉전 이후 유일 초강국으로 남은 미국 사회의 명암을 파헤칠 ‘제국의 그늘’은 이번호부터 격주로 연재됩니다.